제가 참석하고 있는 무교회 일요집회에서는 여러 사람이 돌아가면서 주일말씀을 전합니다. 한 두 사람이 말씀을 전하는 것 보다는, 모든 사람이 성서를 읽고, 나름 깨달은 바를 서로 나누는 것이 무교회의 본 방향이라는 뜻에서 몇 해 전부터 그렇게 하고 있지요. 그 덕분에 저 같은 사람도 일년에 두 번 정도 강단에 서서 말씀을 전합니다. 아래 글은 2013년 4월 7일 풀무일요집회 본강에서 나눈 이야기를 다듬은 것입니다. 이 글의 절반을 차지하는 김재수형이 자신의 글을 공개한 것처럼, 저도 공개를 하렵니다. 질문과 반론은 환영합니다. 다만 그때그때 성실한 답변은 약속드릴 수 없습니다. 이해를 바랍니다.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서기관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_마가복음 12장 28절~34절


오늘은 자본주의와 이웃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주제가 너무 거창한 것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만, 실은 그렇지 않은 이야기, 그렇게 여기지 말아야 할 이야기들이니, 최대한 끌어당겨서 가까운 이야기로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미국 어느 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는 김재수님의 글을 함께 읽고 나누려고 합니다. 이 글은 그 분이 얼마전에 미국 동부지역의 기독 청년이 모이는 킹덤이라는 집회에서 강의했던 "하나님의 나라와 자본주의"에 대한 내용입니다. 

-----------------------------------

하나님의 나라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것과 같은 세상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 세상을 하나님이 아닌 무엇이 통치하고 있는지 먼저 질문해야 합니다. 앞서 설명 드린 것처럼, 예수시대에는 로마 제국주의와 성전체제가 통치했고, 이 시대에는 천민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가 통치하고 있습니다. 특히 가장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고통의 장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기업들의 무자비한 이윤추구는 종종 우리 이웃들의 희생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고, 우리 현대인들은 그 과정의 톱니를 이루는 노동자로 소비자로 참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노예제도가 있던 시절, 대부분의 사람들 - 노예주와 노예 모두가 노예제의 부당함을 인식하지 않으며 살아간 것처럼, 우리도 자본주의의 지배를 부당하지 않게 여기며 살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최고선은 기업의 이윤추구입니다. 이윤추구는 모든 것보다 중요한 목표가 되고, 모든 수단을 정당화 합니다. 1993년 크리스마스의 늦은 밤, 한 여인이 네 명의 아이들을 태우고 Malibu를 운전하고 있었습니다. (말리부는 제너럴모터스라는 자동차회사의 한 차종입니다) 빨간불 앞에서 잠시 정지하고 있던 중, 갑자기 뒤에서 차량이 충돌하였고, 곧 그녀와 아이들이 탄 차량은 불길에 사로잡혔습니다. 세 명의 아이는 60% 이상의 화상을 입었고, 그녀는 한 손을 절단해야 했습니다. 이후 지루한 법정 공방을 통해서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GM은 비용 절감을 위하여 연료탱크를 차량축 바깥에 설치하였습니다. 물론 GM은 사고 시에 큰 화재가 날 수 있다는 사실을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경영진은 이와 관련한 비용과 편익을 분석하였습니다. 예상 사망자 500명, 사망자당 평균 보상비용 $200,000(20만달러, 2억2천만원), 예상 판매 대수 41,000,000(4천백만)대. 결국 차량 한 대당, 사고에 따른 기대비용은 약 $2.40(2,700원)이었습니다. 반면 사고 시 연료탱크에 화재가 나지 않도록 차량을 설계하기 위해서는 한 대당 $8.59(9,700원)를 지출해야 했습니다. 결국 GM은 대당 $6.19(7천원)의 편익을 얻기 위해 사람들이 죽도록 방치하는 방식을 선택한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이 사용하고 있는 각종 제품을 만드는 삼성의 반도체 공장에서 58명의 노동자들이 백혈병 및 각종 암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과 나이가 다르지 않은 젊은이들이 죽어 나갔습니다. 안전장치도 없이 각종 화학 유해 물질에 노출된 환경에서 일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부는 이를 조사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언론도 일반 대중들도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삼성 때문에 한국이 먹고 산다고 믿는 이들이 참 많기 때문입니다.

-----------------------------------

김재수님의 원 글에는 없는 내용이지만 삼성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하도록 하겠습니다. <삼성이 버린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삼성전자·반도체에서 일하다가, 병들거나 죽은 사람들, 그리고 그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반올림에 제보된 150여명중 11명 노동자의 몸과 삶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책에 있는 이야기 중에 유명화님의 인터뷰 한 구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고3 여학생이었던 유명화님은 2000년 삼성반도체 온양공장에 입사해서 고온테스트공정에서 일하다가 1년 만에 중증 재생 불량성 빈혈에 걸렸습니다. 

"못 해본 게 너무 많죠. 연애도 못해봤으니까. 어딜 놀러가 보지도 못했고. 저는 졸업여행도 못 갔거든요. 삼성에 3학년 때 들어가서.... 다시 시간을 되돌린다면 삼성에 가지 않을거에요"

유명화님은 2001년부터 현재까지 12년간 남의 피를 수혈 받아 생명을 이어왔는데, 최근에 상태가 많이 악화되어서 무균실에 입원해 있다고 합니다. 삼성에서 남편을 잃은 아내, 정애정씨의 이야기를 다룬 <먼지 없는 방>이라는 만화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보도자료에서 일부를 읽어드리겠습니다. 

정애정씨는 열아홉 살에 삼성반도체 공장에 들어갔다. 엄마 품을 떠나 독립을 했다는 것이 좋았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삼성에 입사한 것도 좋았다. 삼성맨이라는 자부심으로 열심히 일을 했고, 그곳에서 남편 황민웅 씨를 만났다. 첫째아이로 아들을 낳고 둘째아이를 가졌을 즈음에 남편이 백혈병에 걸렸다는 걸 알았다. 남편은 둘째아이의 출생신고를 손수 마치고 골수이식 수술을 기다리다 끝내 세상을 떠났다.
 
정애정 씨는 삼성반도체 공장에 들어가 처음으로 반도체를 만났다. 기름때와 어두운 색깔의 작업복으로 생각되는 일반적인 공장과는 달리, 반도체 공장에서는 티끌 같은 먼지 하나도 철저하게 관리한다. 하얀색 방진복과 방진모, 마스크를 쓰고 ‘에어샤워’까지 한다. 공장 안은 특수 배기시스템을 통해 먼지가 걸러진 공기가 흐른다. 공장 안에서는 모든 것이 깨끗해야 한다. 먼지가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사람도, 물건도 공장의 청정수칙에 따라 다뤄진다. 반도체는 먼지에 아주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반도체 공장을 부르는 말 ‘클린룸’. 그러나 정말 깨끗할까? 큰 설비와 수많은 기계에서는 기계 소리가 계속 났다. 공장 안에 들어서면 항상 화학약품 냄새가 났다. 직원들 사이에서 누구는 아들을 못 갖는다는 둥 뜬소문이 돌았다. 여성 작업자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생리불순이나, 하혈은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생기는 당연한 일로 생각했다. 심지어 종종 들리는 유산 소식도 단순한 개인의 문제로 돌려졌다. 그 누구도 공장의 환경이 반도체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깨끗한지 묻지 않았다.

저는 지난해 여름, 우연히 홍성도서관에서 이 책 <먼지없는 방>을 꺼내들어 읽었습니다. 터지는 울음은 간신히 참아냈는데, 가슴이 먹먹한 것은 도저히 어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다시 김재수님의 글로 돌아가겠습니다. 

-----------------------------------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 영국의 대처 수상 이후로 우리는 지난 30년 동안 이어진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는 경제 성장을 최우선의 정책 목표로 합니다. 경제 성장이 공정한 분배보다 중요하다는 인식 때문에, 부자감세 즉 최상위 소득층에 대한 세금 감면이 주요 경제 정책입니다. 따라서 경제 성장이 이루어진다 하여도, 그 혜택은 소수의 특권 집단에게 집중되고, 대다수 국민들의 삶의 질은 향상되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신자유주의는 정부의 역할을 줄이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있고, 복지 예산 및 가난한 사람들을 보호하는 사회적 안전망을 축소하였습니다.

그 결과, 지금은 어느 때보다 빈곤층의 증가 및 양극화 현상이 두드러집니다. 미국은 산업 국가 중에 가장 극심한 소득불평등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상위 0.1% 소득층의 수입은 하위 90% 소득층 평균 수입의 220배를 벌고 있습니다. 자산불평등은 더욱 심각해서, 상위 1%의 사람들은 전체 자산의 1/3 이상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미국의 중산층과 저소득층은 대부분의 자산을 손실했지만, 이 와중에서도 최상위층의 소득 및 자산은 증가 하였습니다. 더 큰 문제는 기회조차도 더 이상 평등하게 주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소득 분포상 하위 50% 이하의 학생들이 상위 대학에 입학하는 비율은 9%에 불과합니다. 즉 여러분의 부모님이 부자이고 고학력자라면 좋은 대학에 가고 고소득 직장을 얻을 확률이 높지만,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도 가난하게 살 확률이 높다는 이야기입니다. 경제학자들은 미국이 더 이상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메리칸 드림을 원하시면 덴마크로 가십시오.

한국의 상황 역시 심각합니다. 세계 최빈국 중 하나에서 부자클럽이라는 OECD 회원국이 되었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소위 자살공화국이라 불리울 정도로 최고의 자살률을 보이고 있습니다. 어린이와 청소년의 행복지수는 최하위이고, 비정규직 비율과 저임금 노동자의 비중 그리고 노인빈곤율 역시 가장 높습니다. 역시 사교육비 부담도 최고입니다. 성폭력은 세계 4위, 아동 성범죄는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문가가 아니어도 이 모든 문제들의 근원으로 자본주의의 무한경쟁과 경제적 불평등 현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시대를 사는 청년들에게 부탁드립니다. 역사적 예수의 영성을 따라, 체제 밖의 사람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영성을 배우십시오. 하나님의 영이 임재하는 순간은 다른 사람의 고통이 자신의 고통으로 느껴지는 때입니다. 하나님이 임하시면, 우리같이 이기적인 사람도 자아중심성이 무너지고, 다른 이의 아픔을 공감하게 됩니다. 청년 여러분, 성령충만을 받으십시오. 삼성전자의 반도체 공장에서 죽어간 여공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쌍용자동차의 해고 노동자들의 자살 행렬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의 아픔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때에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임재하고 계십니다. 청년 여러분, 성령충만을 받으십시오.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죽어간 팔레스타인 아이들, 이미 몇만명이라는 민간인 사망자를 낳은 시리아 사태, 구럼비 바위와 함께 평화의 정신이 산산이 부서지고 있는 제주도 강정마을의 현실, 북송의 공포로 떨고 있는 탈북자들의 아픔이 여러분 자신의 아픔이 되는 성령충만함을 받으십시오.

삶의 벼랑 끝에 내몰린, 고통 속에 신음하는 이들의 아픔에 주목하십시오. 그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가지고 오십시오. 도리어 여러분이 겪고 있는 상처가 치유되는 놀라운 경험을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삶의 무게도 가벼워지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신비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신앙 고백이고, 이 땅에서 얻는 구원과 해방입니다.

-----------------------------------

여기까지가 김재수님의 이야기이구요, 지난 1월 페이스북을 통해 이 글을 접하면서 언젠가 풀무고 친구들에게 전해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김재수님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하기란 거의 불가능다는 인식이 필요합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왜 그럴까요? 자본주의의 핵심은 돈입니다. 돈이 가지고 있는 화폐가치가 워낙 높다보니 어느새 하나님도 가려지고, 사람도 가려지기 때문입니다.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것이지요. 둘째로 돈이 가지고 있는 교환기능은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 시켜주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완전한 단절을 만들어냅니다. 내가 원하는 어떤 것을 손에 넣기 위해 내 손에 피한방울 안 묻혀도,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내가 지불한 만큼 원하는 어떤 것이 척척 손에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셋째로는 이런 상황이 너무나도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중의 대부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자본주의 말고 전혀 다른 사회를 통째로 접해볼 기회가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그 많은 노예와 종들이, 그 오랜 세월동안 스스로의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인 것처럼요. 물론 노예들이 억울함을 느끼고 한을 품기도 했지만, 그 상태를 역전시키고 싶다, 역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지요. 넷째로는 이런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또는 의도적으로 자본주의를 확대, 재생산, 강화시키는 미디어에도 큰 책임이 있을 것입니다. 이쯤에서 권정생 선생님의 글 중에 한 구절을 인용해서 함께 읽겠습니다. 

   오늘날 이 지구 위엔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만, 그러나 아직도 끔직한 살인과 약탈은 끊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도의 지능으로 속임수를 써가며 죽이며 빼앗습니다. 그 방법이 너무나 교묘하기 때문에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 분간이 잘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잘못 판단하면 어느새 나 자신이 끔찍한 흉악범의 편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입고 있는 옷과 오늘 아침에 먹은 음식과 그리고 무엇을 지니고 있는가 모두가 정당한 것인지 생각해보셨나요? 
   무엇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를 부당하다고 생각하신 부처님이나 예수님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것으로 우리를 가르쳐주었습니다. (중략) 우리가 알맞게 살아갈 하루치 생활비 외에 넘치게 쓰는 것은 모두 부당한 것입니다. 내 몫의 이상을 쓰는 것은 벌써 남의 것을 빼앗는 행위니까요. 
_<우리들의 하나님> p.10 책머리에 

권정생 선생님의 글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언제나 강력한 메세지를 전해주십니다. 다른 말 덧붙일 것도 없이 새겨 읽고, 또 새겨들어야겠습니다. 

앞서 나누었던 김재수님의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자본주의를 바로 알자. 그래야 부당한 지배와 인식에서 벗어나 진짜 내 이웃이 누구인지 눈에 들어오고 또 그 이웃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처럼, 시대의 약자들에게 귀를 기울이자, 이웃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받아들이자는 것입니다. 그 순간에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또 성령께서 임재하셔야 온전히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저도 여러분에게 동일한 내용을 부탁합니다. 사람은, 학생인 여러분은, 또 나이를 막론하고 학생과 신앙인의 의무를 지닌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은 '내가 원하는 것이 진짜로 내가 원하는 것일까?'를 끊임없이 되묻기를 바랍니다. 내 의도와 상관없이 ‘물려받은 또는 전염된 욕심은 아닐까?’를 늘 살펴보기를 바랍니다. ‘나’라는 존재는 언제나 세상과 연결되어있습니다. 때문에 나를 살피는 것처럼, 세상을 살피는 것에도 열심을 내야합니다. 나의 신앙을 바로세워서 하나님을 바로 섬기고, 이웃을 온전히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끊임없이 살피고 살펴야 합니다. 

이번에는 저의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6년전, 그러니까 이 곳으로 내려오기 1년 전에 서울에서 들었던 생태학교 수업을 마치고 쓴 후기입니다. 이 수업은 기독청년아카데미와 기독교환경운동연대가 공동기획해서 마련한 수업이었구요, '인간과 자연이 더불어 사는 삶'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8주 동안 공부하는 과정이었습니다. 

-----------------------------------

2007년 봄학기 기독청년아카데미 생태학교 수업 후기
나는 오늘도 두 사람을 죽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대한민국의 어떤 현행법도 나의 살인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았다. 아니 관심도 가지지 않았다. 나의 생태발자국*은 330이다. 이 수치는 오늘 하루 나의 삶을 위해 세 사람 분의 지구를 소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먹고 마신 공기와 음식은 동시대일 수도 있고, 다음 세대일 수도 있는 어느 두 사람의 생존을 위해 절대적인 것이었을게다. 결국 나는 오늘 하루 나의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두 사람의 목숨을 빼앗은 셈이다.

과대망상증 환자의 헛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차근차근 생태학교 수업을 듣다보면, 이 이야기가 터무니없이 비약적인 논리로 짜여진 허무맹랑한 소리가 아님을 잘 알 수 있다. 다만 처음에는 '실감'이 안날 수도 있다. 내가 생태학교 수업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빼앗은 생명과 깨트린 평화에 대한 '실감'이었다.

'잘' 살고 싶었다. 나와 아내, 그리고 이번 여름에 새롭게 태어나는 아이의 건강한 삶을 위해 좋은 것을 먹고, 입고, 마시고 싶었고, 궁극적으로는 도시를 떠나 자연과 가까운 곳에서, 흙을 밟고, 맑은 공기를 마시며, 내 손으로 직접 지은 집에서 살고 싶었다. 그렇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생태적인 삶이, 친환경적인 삶이 다른 어떤 삶보다 사람에게 이로운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처음에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좀 더 '잘' 살 수 있을까를 배우기 위해 생태학교를 시작했다.

'살리며' 살자. 나와 내 가족만 잘 사는 것을 넘어, 사람과 자연을; 이웃을 살리며 살자. 아니 일단은 '덜 죽이며' 살자. 생명을 살리기는커녕, 죽음으로 몰아넣으며 이제까지 하루하루 살아왔음을 실감하는 것은, 인정하는 것은 ‘생명을 살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자고 다짐한 나에게 무척이나 모른 척하고 싶은 일이었다. 하지만 외면한다고 회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사람과 사람이, 사람과 자연이 어떻게 연결되어있는지 실감할수록,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새롭게 배우고 깨달을수록, 그래서 마음이 무거워지고 괴로워질수록, 몸이 지금보다 불편해질수록 오히려 그게 그리스도인답게, 사람답게, 바르게 사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 생태발자국은 한 사람이 삶을 영위하기 위해 매일매일 '소비하는 자원'을 생산하고, '배출하는 쓰레기'를 처리하기 위해 필요한 토지와 물의 양을 계산한 것이다. 계산된 결과 수치는 자연에 얼마만큼 해로움을 끼치고 있는가를 보여주며, 한 사람의 생활을 위해 몇 개의 지구를 소모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생태학교 수업후기> 2007.5.29 http://www.waterclimber.net/blog/364

-----------------------------------

이 후기의 내용 중에 따로 '자본주의'라는 단어를 언급하지는 않았습니다만, 당연한 배경이었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나름 생태적으로 살아보려고, 소비를 줄여보려고 애쓰던 신혼살림이었지만,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직장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자본주의 체제의 충실한 일원으로 살아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나 자신도 알게 모르게 누군가를 착취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상태에 놓여있었다는 것이지요. (도시와 농촌을 비교해서 농촌이 더 좋다는 이분법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여기 작은 농촌마을에서 살아간다고해서 자본주의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니까요. 오히려 정신을 차리고, 지금 여기에서 나를, 이 사회를 잘 살펴보자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번에는 목적이 이끄는 삶에 나오는 한 구절을 인용해보겠습니다. 

Everybody eventually surrenders to something or someone. ... You are free to choose what you surrender to, but you are not free from the consequences of that choice. ... Surrendering is never just a one-time event. ... Surrendering is moment-by-moment and lifelong. 
_The Purpose Driven Life Day 10

우리 모두는 결국 무언가 또는 누군가에게 항복을 합니다. 자신을 내어 맡깁니다. .... 당신은 당신이 어디에 항복할 것인지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 선택의 결과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 이런 항복은 일회성 이벤트가 결코 아닙니다. .... 항복은 매 순간 평생동안 이어지는 일입니다.

다시 한번 권합니다. ‘매일의 삶 가운데 나의 주인은 누구인가? 나는 의식적으로 누구를 섬기고 있으며 무의식적으로 무엇에 지배당하고 있는가?’를 잘 살펴보시기를 권합니다. 여러분 삶의 주체는 진정 여러분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렇게 자신의 삶의 참주인으로서 책임있는 믿음과 의지와 행동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권정생선생님의 글 중에 두 구절을 인용하면서 오늘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공존은 성스럽다. 이웃 사랑은 남의 것을 빼앗지만 않으면 된다. 되고 주고 말로 빼앗아 가는 자선사업은 가장 미워해야할 폭력행위이다.
_<나의 동화 이야기>중에서, 권정생, <<빌뱅이 언덕>> p.18

   가난한 자에게 필요한 것은 그 가난한 자 곁에서 함께 가난해지는 것뿐이다. 예수님이 만약 화려한 옷을 입고 고급주택에 살며 고급승용차에 경호원을 데리고 나타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몇백만원씩 나눠주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가 능수능란한 부흥사도 아니고 자선가도 아니고 혁명가도 아니고 예언자도 아니라 가장 소박한 한 인간으로 우리 곁에서 33년 동안 고락을 함께 해준 삶 때문인 것이다. 이 세상에 위대한 성자는 예수님 한분으로 족하다. 
   우리는 누구나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 생각해보면 허무하기 짝이 없는 짧은 목숨인데 만물의 영장이라 일컫는 인간들만 유독히 이 지구상에 암처럼 온갖 나쁜 짓을 다 저지르고 있지 않은가. 지구 멸망은 인간들의 욕심이 빚어낸 결과이지 결코 천재지변은 아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어떤 직분을 가졌든 함께 일하며 살아가는 삶이 있을 때, 이 험함 세상 조금은 따뜻해지고 시한부 종말을 기다리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없어질 것이다. 가장 겸손한 삶은 이웃과 함께 일하며 살아가는 것뿐이다. 
_<휴거를 기다렸던 사람들>중에, 권정생, <<우리들의 하느님>> p.41




  1. 현욱 2013.04.26 10:24 신고

    주님께서 일러주신 이웃을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신말씀 . 거기엔 현재의 이웃의 고난을 도우라는 말씀도 되겠지만 그보다 주님께서 일러주신 가장 선한 일은 썩지않을 면류관을 위한 복음을 그들에게 전하는게 아닐까
    현재의 고난과 핍박보다 낙원에서 주님과 함께 할 소망이 비록 원수같은 이웃에게도 주어 진다면 그보다 더한 사랑의 완성이 어디있을까..

  2. 현욱 2014.06.21 02:04 신고

    아아 내가 일년전에 저런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구나 .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실제의 삶 가운데에서, 복음은 주님 스스로 말씀으로 당신의 백성들에게 들어와 버린다는 진리를 바라봅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