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월감에 대한 이야기
_보루, 2015.12.13 풀무일요집회 전강

오늘 전강에서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우월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2012년 5월 전강에서 이미 한번 나누었던 내용이랍니다. 좀 더 다듬기는 했지만,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에 대해 어르신들의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풀무학교라는 독특한 출신을 지니게 될 학생들과 한번쯤은 꼭 나누고 싶은 이야기여서 다시 꺼냅니다만, 괜한 오지랖은 아닐까 싶어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먼저 우월감이 드러나는 모습을 개인적 / 집단적 / 민족적 / 종교적인 차원에서 나누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번째로,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우월감입니다. 우월감(優越感)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스스로 남보다 뛰어나다고 여기는 생각이나 느낌’이라고 합니다. 누구보다 낫다고 하는 비교에서 비롯한 느낌인 것이지요. 우월감에 심하게 사로잡힌 사람들은 대개 자기의 생각과 행동이 대부분 옳다고 여기거나 주장하는 심리 상태를 가집니다. 그 때문에 1.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잘 기울이지 않고, 마음도 잘 열지 않습니다. 2. 그러나 한편으론 다른 사람들도 이 사람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지요. 교만하고 독선적인 사람은 좀처럼 재수가 없으니까요. 아무리 옳은 말을 하더라도 말이지요. 3. 결국 주위 사람들과 말이 통하지 않고 고립되게 됩니다. 자의반 타의반 귀가 막히는 것인데, 귀가 막히면 진리를 알 수 있는 길도 함께 막히게 됩니다.
 
두번째로, 집단적인 차원에서 우월감은 어떻게 드러날까요? 집단적인 차원에서는 우월의식, 엘리트의식, 정예주의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요, 타인, 타집단에 대해서 배타적이고 배제 / 무시 / 차별을 하는 등 개인적인 차원과 마찬가지로 소통이 어려워지는 것은 물론이고요, 여기서부턴 폭력성이 두드러지기 시작합니다. 집안이나 혈통, 출신학교에서 두드러지는데, 풀무출신이라는 말을 종종 사용하는 우리는 여기에서 조금도 자유롭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먼나라의 이야기를 예로 들자면 인도에서는 혈통에 따라 카스트제도와 같은 신분제가 유지되어왔구요, 우리나라도 불과 백여년 전에는 혈통에 따라 양반과 상놈의 차별이 대대손손 이어져 내려왔었습니다. 그러고보면 자신들의 신분과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일부러 사람들의 마음에 끊임없이 우월감과 열등감을 심으려는 시도들이 있어왔던 것 같습니다. 무서운 이야기지요.

세번째로 민족,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우월감은 어떻게 드러날까요. 민족주의, 인종주의의 형태로 드러나는데요, 전단계보다 타인, 타집단, 타인종에 대한 폭력성이 훨씬 더 커지게 됩니다. 좀 더 심각한 차별, 예를 들면 인종차별이나 전쟁, 학살과 같은 일들이 일어나는데요, 백인우월주의, 나찌 히틀러의 유태인과 장애인 대학살과 같은 예를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타인에게 심각한 차별과 폭력을 저지르면서도 오히려 이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우열을 이야기합니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 약한자는 먹이다 라고 진화론에서 이야기하는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법칙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지요.

이런 것을 사회 진화주의(社會進化主義, Social Darwinism)라고 하는데요, 19세기 찰스 다윈이 발표한 생물진화론을 바탕으로, 사회의 변화와 모습을 해석하려는 견해로 허버트 스펜서가 처음 사용한 개념입니다. 그 후 19세기부터 20세기까지 크게 유행하였고, 지금도 여전히 그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보입니다. 사회진화론은 앞서 예를 든 것처럼 인종차별주의나 파시즘, 나치즘을 옹호하는 근거로 쓰이기도 하였을 뿐만아니라 신자유주의의 경제적 약육강식 논리에서도 여전히 자주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사회진화론은 식민지 개발과 후진국 착취를 정당화하였는데요, 역시나 서구 문명에 대한 지나친 우월감에서 비롯한 것이었습니다. '식민지 개발은 정당화될 수 있고, 서구 문명은 우월하다.'라는 것이지요.

가까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요즘들어 여기 시골 동네에서도 외국인을 보는 일이 흔해졌습니다. 백인 원어민 교사도 쉽게 볼 수 있고, 동남아에서 온 이주노동자들도 어렵지 않게 마주칩니다. 그런데 이들을 보는 시선이 대게 어떤가요? 왠지 우러러보는 시선과 괜히 깔보는 시선으로 나뉘지는 않나요? 심하지 않다하더라도 전혀 차이가 없다고 말하기가 사실 어렵지요.

마지막으로 종교적인 차원에서의 우월감을 살펴보고 싶습니다. 종교적인 차원은 이미 앞서 살펴보았던 집단적인 차원, 민족적인 차원에서 보여지는 배타성, 폭력성과 겹쳐지는데요, 다른 예들보다는 유대인의 선민사상, 기독교인의 선민의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유대교에서 선민(選民, chosen people)은 유대 민족이 세계의 모든 국가 중에서 하느님의 진리를 선포하는 사명을 완수하고, 하느님만을 섬기기 위해 선택되었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누가복음 4:25~30을 잠시 읽겠습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하나님은 유대인만이 아니라 나아만에게도, 이방인들에게도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시자,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에 대해 매우 크게 화를 냈습니다. 예수님을 낭떠러지에서 밀쳐 떨어뜨려 죽이려 들 만큼 화를 냈습니다. 바울도 비슷한 경우를 당합니다. 사도행전 22:21~23을 잠시 읽겠습니다.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이 말하는 것까지 그들이 듣다가 소리 질러 이르되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

하나님이 자신을 이방인에게 보내시려 한다고 바울이 말하자, 이말을 들은 유대인들은 미친듯이 날뛰며 바울 또한 죽여버리자고 합니다. 그들의 그릇된 선민의식은 그들의 눈과 귀를 진리로부터 막아버리고, 거부하고 외면하게 만들었습니다.


맨 처음 이야기한 개인적인 차원 뿐만 아니라, 집단적이거나, 민족적인, 종교적인 각각의 차원에서 보여지는 타인에 대한 폭력성과 스스로 고립이 되고마는 현상의 밑바닥에는 우월감이라는 몹쓸 감정이 공통적으로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원래부터 악한 존재였을까요? 그래서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기 위해 무리를 모으고, 우월을 과시하고,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했을까요? 저는 오히려 그 반대로 너무 약한 존재여서 그랬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에게 밟힐까봐 두려워서 무리를 지었고, 못 났다는 이야기, 틀렸다는 이야기가 참을 수 없어서 그랬고, 자신을 보호하고 지키려다보니 우열에 대해 민감해졌다고 생각합니다. 비교당하고, 못 났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때로는 틀렸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무너져버리지 않을만큼 강하지 못했기 때문에, 단단한 지반 위에 서 있지 못했기 때문에 그랬다고 생각합니다.

우월감은 열등감과 이어져있다고 합니다. 동전의 양면처럼 말이지요. 열등하다고 느끼는 사람일수록 오히려 우월한 존재가 되려고 애쓰거나, 자기보다 더 열등한 존재를 찾으려고 애쓰게 됩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상처를 받지 않으려고 오히려 상처를 주고마는 꼴이 되곤합니다. 자존감의 바탕이 다른 사람과의 상대적인 비교에서 비롯되어 생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폭력과 고립의 원인이 되는 우월감, 그리고 열등감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요? 남들과 달라도, 비교를 당해도, 못 났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틀렸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그래서 흔들리고, 무너져도 괜찮아, 다시 일어날 수 있을거야라고 생각할 만큼 강해질 수 있을까요? 저는 우리가 서 있는 지반이 어떤지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 서 있는 자신을 먼저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자아성찰과 신앙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내가 누구일까? 비교하지 않아도, 타인이 인정해주지 않아도 나 스스로가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내 모습은 무얼까?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어봅시다. 비교할 수 없는, 상대적이지 않은, 흔들리지 말아야 할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일은 절대적인 존재와 연결되어야만 풀리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바라보실까? 성경에서 말하는 ‘나’라는 인간의 본질은 무엇일까? 고민해야합니다. 나중에 천국에 가려고, 지옥 가는게 무서워서 신앙을 가지는게 아니라, 지금 당장 단단한 반석위에 서고 싶어서 우리는 신앙을 계속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존재에 대한 성찰, 신앙에 대한 깊은 질문과 함께 지금 내가 일상에서 닥치는 일들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지금 여기 풀무에서 공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학을 가려는 이유, 농사 짓고 살려는 이유, 집회에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나 이 모든 것들이 진짜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게 아니라,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해서 그러는 것은 아닐까? 욕먹기 싫어서 그러는 것은 아닐까? 내가 더 우월한 존재가 되고 싶어서 그러는 것은 아닐까? 내 못난 모습을 가리기 위해서 그러는 것은 아닐까? 냉정하게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최근에 꼰대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어르신들이 알고 계신 예전의 의미와 약간 다를 수도 있는데요, 나이와 지위를 힘입어 항상 누군가를 가르치려 들거나, 어린 사람들의 시행착오를 안타깝게 여기는 노파심이 그 정도가 지나쳐서 아예 ‘너희가 생각하는게 틀렸다’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최근에 갑질을 한다는 말도 유행하고 있는데요, 역시나 자신의 우월한 어떤 것에 힘입어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맨스플레인이라는 신조어도 마찬가지인데요, 맨스플레인(mansplain)은 남자(man)와 설명하다(explain)가 합쳐진 단어로, 대체로 남자가 여자에게 잘난 체하며 아랫사람 대하듯 설명하는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성장을 합니다. 더 나은 존재가 되려고 애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정도의 차이가 있을뿐 어쨌건 우리는 더 나은 존재가 되어있습니다. 외양으로는 더 높은 지위에 오르거나, 명망이 생기기도 합니다. 나이를 더 먹은 어른이 되어있습니다. 열등감을 가리고 잘난 체하는 것도 문제지만, 진짜로 우월한 존재가 되었을 때에도 여전히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고립될  수 있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존재에 대한 성찰, 신앙에 대한 깊은 질문, 일상 속에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을 언제나 게을리하면 안됩니다. 너무 상투적이고 교과서적인 이야기라며 흘려듣기 쉬운 말이지만, 정말 중요하기 때문에 자꾸 언급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찾았다고, 알았다고 하는 순간이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한번에 알 수 있는게 아니기에, 한번에 체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사람은 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애쓰지 않으면 안됩니다. 애쓰지 않으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눈과 귀를 닫아버리기 쉽상입니다. 그리고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상처를 주고 받으며, 이웃과 진리에서 모두 멀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절대로 꼰대와 갑질과 맨스플레인이라는 말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예수님과 바울을 죽이라고 말했던 사람들, 히틀러의 동료들은 절대로 무식하거나 원래부터 악한 사람들이 아니었음을 기억해야합니다. 사회진화론을 이야기한 사람들은 공부를 할 만큼 한 철학자와 사상가들이었습니다. 집단, 사회, 민족, 종교적인 차원에 우월감에서 비롯된 폭력과 차별을 단박에 끊어낼 수는 없겠지만, 일단은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아 개인적인 차원에서 우월감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노력을 계속해야합니다. 못나도 괜찮다고, 장애가 있어도 괜찮다고 말 할 수 있어야하고, 그 대신 빈자리를 메꿔주고 부족함을 나눠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빌립보서 2:3~8의 말씀을 함께 읽고 싶습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_끝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위 글은 2015.12.13 풀무일요집회 전강에서 나눈 이야기입니다. 풀무일요집회는 무교회집회인데요, 평신도가 성서를 읽고 자기 생각을 함께 나누는 모임이어서, 저같은 사람도 일년에 두번 정도 이야기할 기회를 갖습니다. 우월감은 저의 오래 묵은 고민거리이지요. 위의 글과 함께 옛 글( http://waterclimber.tistory.com/454 )을 함께 읽어보시면, 저의 고민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나 살펴보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나누고 싶었습니다. 관심과 반론 모두 환영합니다.



  1. 여름울 2016.03.01 03:52 신고

    아시시의 프란체스코의 전해지는 많은 이야기들 중 하나입니다. 프란체스코의 제자들이 스승과 함께 40일 금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하루를 남겨 놓은 39일째 되는 날 젊은 제자 하나가 맛있는 스프 냄새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게 한 숟가락을 입에 떠 넣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 함께 금식을 하던 제자들은 눈을 부릅뜨고 그 젊은 제자를 노려보았습니다.

    그 눈길 속에는 유혹에 넘어간 불쌍한 영혼을 향한 애처로움이 아니라 분노에 찬 정죄의 따가운 시선이 들어 있었습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았던 제자들은 유혹에 넘어간 젊은 제자를 엄하게 꾸짖어주기를 바라며 스승, 프란체스코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프란체스코는 말없이 수저를 집어 들더니 젊은 제자가 먹었던 스프를 천천히 떠먹기 시작했습니다. 경악의 눈길로 스승을 쳐다보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 프란체스코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우리가 금식을 하며 기도를 드리는 것은 모두가 예수님의 인격을 닮고 그분의 성품을 본받아 서로가 서로를 참으며 사랑하며 아끼자는 것입니다. 저 젊은이가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스프를 떠먹은 것은 죄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를 정죄하고 배척하는 여러분들이야말로 지금 큰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굶으면서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는 실컷 먹고 사랑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출처:
    교회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들'
    최태선 목사의 '평화의 사람들', 경건의 능력인가 폭력인가
    2016.02.14 04:36:50
    http://m.newsm.com/news/articleView.html?idxno=5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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