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일요집회 본강에서 나눈 이야기와 이후에 들었던 생각들을 간략하게나마 여기에 적어둡니다.


1. 시편을 통해 하나님의 언어; 기도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본회퍼의 『시편 이해』의 일부를 함께 읽었다. 본회퍼는 루터의 말을 인용하며 시편을 통해 기도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고, 배워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사랑하는 우리 주님은 시편과 주기도문으로 기도를 가르치시고 기도의 영을 부어 주시어, 우리가 진지한 믿음과 기쁨으로 끊임없이 바르게 기도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셨다. 왜냐하면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이 기도를 명령하셨고 우리가 이것을 소유하기 원하신다."_루터

"어린아이는 아버지가 건네는 말을 통해 말하는 법을 배웁니다. 즉, 아버지의 언어를 배우는 것입니다. ...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언어를 따라 말하면서 시작됩니다." _디트리히 본회퍼


2. 아침마다, 예배마다 시편을 꾸준히 읽어봅시다. 

매일 아침마다 시편을 읽는 습관, 예배 때마다 꾸준히 시편을 읽는 전통의 유익에 대해 더 말해 무엇하랴. 문제는 실제로 그렇게 안한다는 것일 뿐. 오랫동안 성경을 덮어두고 살았다만, 이번 본강을 계기로 시편만큼은 다시 챙겨 읽으려한다.


3. 시편을 외웁시다.

무교회집회에서 어린이 예배에 대한 별다른 전통이 없다는 것은 큰 약점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론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유년 시절의 교회 생활을 되돌아보면 유익하고 행복했던 기억과 함께 그 곳에서 알게 모르게 스며든 ‘두려움’과 ‘죄책감’에 오랫동안 시달렸던 기억이 함께 떠오른다. 아이들에게 두려움과 죄책감을 심어주지 않으면서 신앙을 갖게하는 방법을 (알고 싶었다 그러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동안은 무교회집회가 있는 일요일 아침이면 아이들과 한자리에 둘러앉아 성경을 읽어주거나, 옛이야기를 함께 읽는 정도의 습관을 가지는 것이 전부였다. 일부러 "~ 해야한다,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식의 설교는 최대한 배제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보려고 한다. 바로 시편 외우기. 아이들이 시편암송이라는 최소한의 강요(?)를 통해 두려움과 죄책감에서 비교적 자유로우면서도 신앙을 가질 수 있는 길이 열리기를 바란다. 


4. 시편을 유산으로 물려줄 수 있습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몇 해 전, 당신의 목소리를 녹음해놓고 싶었다. 할머니에게 좋아하시는 찬송과 말씀 그리고 기도를 부탁드렸다. (할머니의 이야기▶) 그때 읽어주신 말씀이 바로 시편 23편이다. 할머니가 읽어주시는 시편 23편은 그래서 나에게 매우 각별하게 다가온다. "참 좋다. 이거 외던거야~"라는 할머니의 이야기가 그 어떤 설교보다 (심지어 같은 해에 태어난 디트리히 본회퍼의 이야기보다 더) 강력하게 나를 말씀으로 끌어당긴다. 같은 방식으로 혹시 내가 남겨 놓은, 아빠가 암송하던 시편의 어느 구절이 여름이와 여울이에게 각별하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우월감에 대한 이야기
_보루, 2015.12.13 풀무일요집회 전강

오늘 전강에서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우월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2012년 5월 전강에서 이미 한번 나누었던 내용이랍니다. 좀 더 다듬기는 했지만,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에 대해 어르신들의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풀무학교라는 독특한 출신을 지니게 될 학생들과 한번쯤은 꼭 나누고 싶은 이야기여서 다시 꺼냅니다만, 괜한 오지랖은 아닐까 싶어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먼저 우월감이 드러나는 모습을 개인적 / 집단적 / 민족적 / 종교적인 차원에서 나누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번째로,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우월감입니다. 우월감(優越感)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스스로 남보다 뛰어나다고 여기는 생각이나 느낌’이라고 합니다. 누구보다 낫다고 하는 비교에서 비롯한 느낌인 것이지요. 우월감에 심하게 사로잡힌 사람들은 대개 자기의 생각과 행동이 대부분 옳다고 여기거나 주장하는 심리 상태를 가집니다. 그 때문에 1.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잘 기울이지 않고, 마음도 잘 열지 않습니다. 2. 그러나 한편으론 다른 사람들도 이 사람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지요. 교만하고 독선적인 사람은 좀처럼 재수가 없으니까요. 아무리 옳은 말을 하더라도 말이지요. 3. 결국 주위 사람들과 말이 통하지 않고 고립되게 됩니다. 자의반 타의반 귀가 막히는 것인데, 귀가 막히면 진리를 알 수 있는 길도 함께 막히게 됩니다.
 
두번째로, 집단적인 차원에서 우월감은 어떻게 드러날까요? 집단적인 차원에서는 우월의식, 엘리트의식, 정예주의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요, 타인, 타집단에 대해서 배타적이고 배제 / 무시 / 차별을 하는 등 개인적인 차원과 마찬가지로 소통이 어려워지는 것은 물론이고요, 여기서부턴 폭력성이 두드러지기 시작합니다. 집안이나 혈통, 출신학교에서 두드러지는데, 풀무출신이라는 말을 종종 사용하는 우리는 여기에서 조금도 자유롭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먼나라의 이야기를 예로 들자면 인도에서는 혈통에 따라 카스트제도와 같은 신분제가 유지되어왔구요, 우리나라도 불과 백여년 전에는 혈통에 따라 양반과 상놈의 차별이 대대손손 이어져 내려왔었습니다. 그러고보면 자신들의 신분과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일부러 사람들의 마음에 끊임없이 우월감과 열등감을 심으려는 시도들이 있어왔던 것 같습니다. 무서운 이야기지요.

세번째로 민족,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우월감은 어떻게 드러날까요. 민족주의, 인종주의의 형태로 드러나는데요, 전단계보다 타인, 타집단, 타인종에 대한 폭력성이 훨씬 더 커지게 됩니다. 좀 더 심각한 차별, 예를 들면 인종차별이나 전쟁, 학살과 같은 일들이 일어나는데요, 백인우월주의, 나찌 히틀러의 유태인과 장애인 대학살과 같은 예를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타인에게 심각한 차별과 폭력을 저지르면서도 오히려 이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우열을 이야기합니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 약한자는 먹이다 라고 진화론에서 이야기하는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법칙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지요.

이런 것을 사회 진화주의(社會進化主義, Social Darwinism)라고 하는데요, 19세기 찰스 다윈이 발표한 생물진화론을 바탕으로, 사회의 변화와 모습을 해석하려는 견해로 허버트 스펜서가 처음 사용한 개념입니다. 그 후 19세기부터 20세기까지 크게 유행하였고, 지금도 여전히 그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보입니다. 사회진화론은 앞서 예를 든 것처럼 인종차별주의나 파시즘, 나치즘을 옹호하는 근거로 쓰이기도 하였을 뿐만아니라 신자유주의의 경제적 약육강식 논리에서도 여전히 자주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사회진화론은 식민지 개발과 후진국 착취를 정당화하였는데요, 역시나 서구 문명에 대한 지나친 우월감에서 비롯한 것이었습니다. '식민지 개발은 정당화될 수 있고, 서구 문명은 우월하다.'라는 것이지요.

가까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요즘들어 여기 시골 동네에서도 외국인을 보는 일이 흔해졌습니다. 백인 원어민 교사도 쉽게 볼 수 있고, 동남아에서 온 이주노동자들도 어렵지 않게 마주칩니다. 그런데 이들을 보는 시선이 대게 어떤가요? 왠지 우러러보는 시선과 괜히 깔보는 시선으로 나뉘지는 않나요? 심하지 않다하더라도 전혀 차이가 없다고 말하기가 사실 어렵지요.

마지막으로 종교적인 차원에서의 우월감을 살펴보고 싶습니다. 종교적인 차원은 이미 앞서 살펴보았던 집단적인 차원, 민족적인 차원에서 보여지는 배타성, 폭력성과 겹쳐지는데요, 다른 예들보다는 유대인의 선민사상, 기독교인의 선민의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유대교에서 선민(選民, chosen people)은 유대 민족이 세계의 모든 국가 중에서 하느님의 진리를 선포하는 사명을 완수하고, 하느님만을 섬기기 위해 선택되었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누가복음 4:25~30을 잠시 읽겠습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하나님은 유대인만이 아니라 나아만에게도, 이방인들에게도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시자,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에 대해 매우 크게 화를 냈습니다. 예수님을 낭떠러지에서 밀쳐 떨어뜨려 죽이려 들 만큼 화를 냈습니다. 바울도 비슷한 경우를 당합니다. 사도행전 22:21~23을 잠시 읽겠습니다.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이 말하는 것까지 그들이 듣다가 소리 질러 이르되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

하나님이 자신을 이방인에게 보내시려 한다고 바울이 말하자, 이말을 들은 유대인들은 미친듯이 날뛰며 바울 또한 죽여버리자고 합니다. 그들의 그릇된 선민의식은 그들의 눈과 귀를 진리로부터 막아버리고, 거부하고 외면하게 만들었습니다.


맨 처음 이야기한 개인적인 차원 뿐만 아니라, 집단적이거나, 민족적인, 종교적인 각각의 차원에서 보여지는 타인에 대한 폭력성과 스스로 고립이 되고마는 현상의 밑바닥에는 우월감이라는 몹쓸 감정이 공통적으로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원래부터 악한 존재였을까요? 그래서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기 위해 무리를 모으고, 우월을 과시하고,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했을까요? 저는 오히려 그 반대로 너무 약한 존재여서 그랬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에게 밟힐까봐 두려워서 무리를 지었고, 못 났다는 이야기, 틀렸다는 이야기가 참을 수 없어서 그랬고, 자신을 보호하고 지키려다보니 우열에 대해 민감해졌다고 생각합니다. 비교당하고, 못 났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때로는 틀렸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무너져버리지 않을만큼 강하지 못했기 때문에, 단단한 지반 위에 서 있지 못했기 때문에 그랬다고 생각합니다.

우월감은 열등감과 이어져있다고 합니다. 동전의 양면처럼 말이지요. 열등하다고 느끼는 사람일수록 오히려 우월한 존재가 되려고 애쓰거나, 자기보다 더 열등한 존재를 찾으려고 애쓰게 됩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상처를 받지 않으려고 오히려 상처를 주고마는 꼴이 되곤합니다. 자존감의 바탕이 다른 사람과의 상대적인 비교에서 비롯되어 생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폭력과 고립의 원인이 되는 우월감, 그리고 열등감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요? 남들과 달라도, 비교를 당해도, 못 났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틀렸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그래서 흔들리고, 무너져도 괜찮아, 다시 일어날 수 있을거야라고 생각할 만큼 강해질 수 있을까요? 저는 우리가 서 있는 지반이 어떤지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 서 있는 자신을 먼저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자아성찰과 신앙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내가 누구일까? 비교하지 않아도, 타인이 인정해주지 않아도 나 스스로가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내 모습은 무얼까?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어봅시다. 비교할 수 없는, 상대적이지 않은, 흔들리지 말아야 할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일은 절대적인 존재와 연결되어야만 풀리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바라보실까? 성경에서 말하는 ‘나’라는 인간의 본질은 무엇일까? 고민해야합니다. 나중에 천국에 가려고, 지옥 가는게 무서워서 신앙을 가지는게 아니라, 지금 당장 단단한 반석위에 서고 싶어서 우리는 신앙을 계속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존재에 대한 성찰, 신앙에 대한 깊은 질문과 함께 지금 내가 일상에서 닥치는 일들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지금 여기 풀무에서 공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학을 가려는 이유, 농사 짓고 살려는 이유, 집회에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나 이 모든 것들이 진짜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게 아니라,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해서 그러는 것은 아닐까? 욕먹기 싫어서 그러는 것은 아닐까? 내가 더 우월한 존재가 되고 싶어서 그러는 것은 아닐까? 내 못난 모습을 가리기 위해서 그러는 것은 아닐까? 냉정하게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최근에 꼰대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어르신들이 알고 계신 예전의 의미와 약간 다를 수도 있는데요, 나이와 지위를 힘입어 항상 누군가를 가르치려 들거나, 어린 사람들의 시행착오를 안타깝게 여기는 노파심이 그 정도가 지나쳐서 아예 ‘너희가 생각하는게 틀렸다’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최근에 갑질을 한다는 말도 유행하고 있는데요, 역시나 자신의 우월한 어떤 것에 힘입어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맨스플레인이라는 신조어도 마찬가지인데요, 맨스플레인(mansplain)은 남자(man)와 설명하다(explain)가 합쳐진 단어로, 대체로 남자가 여자에게 잘난 체하며 아랫사람 대하듯 설명하는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성장을 합니다. 더 나은 존재가 되려고 애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정도의 차이가 있을뿐 어쨌건 우리는 더 나은 존재가 되어있습니다. 외양으로는 더 높은 지위에 오르거나, 명망이 생기기도 합니다. 나이를 더 먹은 어른이 되어있습니다. 열등감을 가리고 잘난 체하는 것도 문제지만, 진짜로 우월한 존재가 되었을 때에도 여전히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고립될  수 있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존재에 대한 성찰, 신앙에 대한 깊은 질문, 일상 속에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을 언제나 게을리하면 안됩니다. 너무 상투적이고 교과서적인 이야기라며 흘려듣기 쉬운 말이지만, 정말 중요하기 때문에 자꾸 언급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찾았다고, 알았다고 하는 순간이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한번에 알 수 있는게 아니기에, 한번에 체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사람은 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애쓰지 않으면 안됩니다. 애쓰지 않으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눈과 귀를 닫아버리기 쉽상입니다. 그리고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상처를 주고 받으며, 이웃과 진리에서 모두 멀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절대로 꼰대와 갑질과 맨스플레인이라는 말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예수님과 바울을 죽이라고 말했던 사람들, 히틀러의 동료들은 절대로 무식하거나 원래부터 악한 사람들이 아니었음을 기억해야합니다. 사회진화론을 이야기한 사람들은 공부를 할 만큼 한 철학자와 사상가들이었습니다. 집단, 사회, 민족, 종교적인 차원에 우월감에서 비롯된 폭력과 차별을 단박에 끊어낼 수는 없겠지만, 일단은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아 개인적인 차원에서 우월감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노력을 계속해야합니다. 못나도 괜찮다고, 장애가 있어도 괜찮다고 말 할 수 있어야하고, 그 대신 빈자리를 메꿔주고 부족함을 나눠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빌립보서 2:3~8의 말씀을 함께 읽고 싶습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_끝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위 글은 2015.12.13 풀무일요집회 전강에서 나눈 이야기입니다. 풀무일요집회는 무교회집회인데요, 평신도가 성서를 읽고 자기 생각을 함께 나누는 모임이어서, 저같은 사람도 일년에 두번 정도 이야기할 기회를 갖습니다. 우월감은 저의 오래 묵은 고민거리이지요. 위의 글과 함께 옛 글( http://waterclimber.tistory.com/454 )을 함께 읽어보시면, 저의 고민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나 살펴보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나누고 싶었습니다. 관심과 반론 모두 환영합니다.



  1. 여름울 2016.03.01 03:52 신고

    아시시의 프란체스코의 전해지는 많은 이야기들 중 하나입니다. 프란체스코의 제자들이 스승과 함께 40일 금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하루를 남겨 놓은 39일째 되는 날 젊은 제자 하나가 맛있는 스프 냄새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게 한 숟가락을 입에 떠 넣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 함께 금식을 하던 제자들은 눈을 부릅뜨고 그 젊은 제자를 노려보았습니다.

    그 눈길 속에는 유혹에 넘어간 불쌍한 영혼을 향한 애처로움이 아니라 분노에 찬 정죄의 따가운 시선이 들어 있었습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았던 제자들은 유혹에 넘어간 젊은 제자를 엄하게 꾸짖어주기를 바라며 스승, 프란체스코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프란체스코는 말없이 수저를 집어 들더니 젊은 제자가 먹었던 스프를 천천히 떠먹기 시작했습니다. 경악의 눈길로 스승을 쳐다보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 프란체스코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우리가 금식을 하며 기도를 드리는 것은 모두가 예수님의 인격을 닮고 그분의 성품을 본받아 서로가 서로를 참으며 사랑하며 아끼자는 것입니다. 저 젊은이가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스프를 떠먹은 것은 죄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를 정죄하고 배척하는 여러분들이야말로 지금 큰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굶으면서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는 실컷 먹고 사랑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출처:
    교회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들'
    최태선 목사의 '평화의 사람들', 경건의 능력인가 폭력인가
    2016.02.14 04:36:50
    http://m.newsm.com/news/articleView.html?idxno=5757

농사를 지으며 건강하게 자라나는 아이들
_<꿈이자라는뜰> 사례를 바탕으로


건강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보통 몸에 병이 나지 않으면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아프지 않으면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아프면, 그것도 많이 아프면, 그제서야 병원을 찾고 큰 돈을 들이기 시작한다. 미리미리 적은 돈과 노력을 들여서 건강을 위해 좋은 음식을 먹고, 땀흘려 일 하고, 종종 운동을 하고, 가끔 여행을 가고 하는 일에 신경을 쓰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기왕에 같은 돈과 노력을 들일 것이라면, 건강할 때, 평소에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왜 병원에 다니고 나서야 시작하는 것일까?
요새 사람들은 참으로 건강해 보인다. 부족함없이 풍요롭게 잘먹고, 잘 입고, 따뜻하고 배부르게 사니 그렇게 보인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요즘 세상에 영양실조로 굶어죽는 사람을 볼 일은 없지만 아토피와 알레르기, 각종 암, 불임과 유산을 비롯해 이전에 들어보지도 못했던 희귀한 병명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소식을 종종 듣는다. 뉴스에서 뿐만 아니라 가까이 지내는 이웃들의 이런저런 아픈 소식을 자주 접하다보니 이제는 정말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건강해 보이는 덩치가 실제로는 건강한 몸이 아니었던 것이고, 마음과 인간관계를 자세히 들여다 보자면 더더욱 건강하다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의 통계는 일부러라도 외면하고 싶을 지경이다.
몸과 마음과 관계가 모두 건강해야 비로소 건강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고 할 지라도, 안녕치 못한 생활환경, 사회제도, 정치경제적인 상황 속에서 개인의 건강은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지속적으로 개인의 건강을 지켜내기가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한편 온전히 건강한 개인과 완벽하게 건강한 사회는 이제껏 이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다만 건강을 이야기할 때, 몸의 건강만이 아니라 다른 영역들도 같은 무게로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온전하지 못한 개인의 상태와 안녕치 못한 사회의 상황을 견디고 바꿔내는 힘을 가지고 있다면, 또는 키우고 있다면 이는 또한 역설적으로 건강한 것이 아닐까하는 이야기도 해보고 싶다. 바로 농사와 엮어서 말이다. 
몸, 마음, 관계가 건강해지는 일과 농사짓는 일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사회제도, 정치경제적인 상황과 같은 국가적인 차원의 이야기는 일단 뒤로 미루어 두더라도, 마을이라는 작은 사회안에서 건강한 생활환경을 만들어가는 일과 농사를 짓는 일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일찍이 권정생선생님은 농사를 지으며 건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남겨주셨다. 그중에 건강하게 자라지 못하는 아이들에 대한 아픈 지적을 남겨주셨기에 일부를 옮겨왔다.

아이들은 시인이라는데 그 아이들이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하는 슬픈 현실은 무엇 때문에 누구 때문에 생겨나는가. 아이들이 시인인 것은 틀림없지만 그 아이들을 시인이 되게 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연이다. 엄니의 젖을 먹으면서 새소리를 듣고 흰 구름을 보고 별을 바라보며, 그리고 짐승들과 벌레들과 어울려 땀 흘리는 고통을 배우고 따뜻한 생명들과 살을 비비는 삶이 있어야 한다. 봄날의 비릿한 풋내와 작은 꽃들도 알아야 하고, 여름날의 소낙비와 무지개와 지루한 장맛비도 알아야 한다. 비지땀을 흘리며 들판에서 일하는 삶의 현장도 배우고, 고통의 대가로 얻어지는 가을의 풍성함, 겨울의 추위와 그 추위를 이겨 내는 생명들의 힘찬 인내도 체험해야 한다. 시인은 절대로 공짜로 얻어지는 게 아니다. 
...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우리 아이들을 자연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기계에서 해방시키고 콘크리트 벽 속에서 풀려나게 해야 한다. 흙냄새, 거름냄새, 풀냄새를 맡게 하고 새들과 짐승들과 얘기를 하도록 하자. 쾡이질을 하고 지게를 지며 땀 흘리는 농군이 되게 하자. 그래서 시인으로 살게 하자. 똑같은 것을 흉내만 내는 인간이 되어 일생을 시체로 살게 버려두는 건 죄악이다. 조금은 가난하고 조금은 불편하고 힘들어도 아이들을 시인으로 키우고 생명 가진 인간으로 키워야 한다. 
... 기계적인 감각에서 손의 감각과 대자연의 감각으로 뻗어 나가면 결국 하늘을 발견하고 그러면서 아이들도 하늘이 된다. 겨울의 눈보라와 여름의 비바람을 헤치며 꿋꿋하게 살아가는 건강한 인간이 마음 따뜻한 시인이 될 수 있다. 

_시를 잃어버린 아이들, 권정생, <<빌뱅이 언덕>> p160~162 (원글은 <시와 사회> 1993)


권정생선생님이 말씀하시는 '시인'이자 '농부'는 맨처음에 이야기했던 '건강한 사람'과 가장 잘 들어맞는 존재이다. 그런 사람을 길러내는 일에 자연과 농사일, 농촌마을 만큼 좋은 것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사전적의미로 발달장애는 '신체, 정서, 지능 따위가 성장하거나 성숙해야 하는데, 본래의 제 기능을 하지 못하거나 결함이 있는 상태'를 말한다. 기존의 잣대로 보자면, 발달장애인은 몸과 마음과 관계가 건강한 사람이 아닌 셈이다.(물론 비장애인 역시 앞서 이야기한 잣대로 보자면, 건강한 사람이 아닌 것은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장애때문에 성장과 성숙, 치유가 상대적으로 더디고 어려울뿐, 아예 불가능한 존재는 아닌 것이 분명하다. 여기에 꾸준히 농사를 지으며 매우 천천히, 느리지만 건강하게 자라나는 아이들이 있다. 우리 아이들, 꿈뜰 아이들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발달장애 청소년을 위해 온마을이 함께 가꾸어가는 농촌형 배움터와 일터
<꿈이자라는뜰>의 시작
2004년 즈음, 홍동중학교 학생들이 학교 밖으로 나와 풀무전공부에서 산책도 하고, 마을주민교사와 함께 원예활동을 하던 것이 처음 시작이었다. 이 활동이 매년 이어지면서 정기적인 방과 후 수업이 되었고, 초등학교 학생들도 참여하는 원예활동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다가 2009년에 홍동초등학교와 홍동중학교가 진행한 전원학교 사업 중에, 이전에 해오던 원예활동을 바탕삼아 <특수교육 대상 학생을 위한 직업교육과정>을 만들었다. 이 교육과정의 이름을 '꿈이자라는뜰'로 부드럽게 다듬고, 이제는  홍동초등학교, 홍동중학교,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 학생들이 매주 정기적으로 마을 주민교사들과 만나는 배움터로 자리를 잡았다. 
 
꿈이자라는뜰의 농업교육활동
꽃밭교실은 초등학생, 꽃나무교실은 중학생, 나농교실은 고등학생을 위한 농업교실이다. 봄가을학기가 시작되면 수업시간을 배정해서 매주마다 2시간씩 학교밖으로 나와 텃밭과 농장에서 일을 하고, 공부를 한다. 농사일 외에도 목공과 풍물, 어울림활동을 함께 하고 있다. 2013년의 경우 초중고등학생 15명과 마을주민교사 7명, 초중고등학교 특수교사와 보조원 5명이 꿈이자라는뜰이라는 작은 울타리에서 함께 어울렸다. 어쩔 수 없는 초중고등학교 특수교사의 변동말고는, 나머지 구성원들은 그동안 큰 변화없이 5년째 지속적인 만남을 이어오고 있다.
  초중고 12년동안 꾸준히 농사일을 하는 것, 또래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 마을 주민교사들과 함께 길게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를 가진다. 발도르프학교에서 또래 그룹이 오랫동안 함께 배움을 이어가고, 같은 교사와 어울려 지내는 것과 비슷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특수교육 전문가는 아니지만, 주민교사는 시간의 힘에 의지해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어려움과 가능성을 동시에 발견해 가고 있다. 아이들끼리도 교실과 책상앞의 기억뿐만이 아니라, 다양할 수 밖에 없는 텃밭에서의 경험과 추억을 공유하며 남다른 또래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꽃밭교실, 꽃나무교실, 나농교실은 꿈이자라는뜰 농장 텃밭에서 꽃과 채소와 허브를 기르는 농사를 짓는다. 땅을 일구고, 씨를 뿌리고, 김을 매고, 수확을 해서 직접 요리를 해 먹거나, 허브차나 메리골드 손수건과 같은 가공품을 만들어 파는 일을 한다. 주로 꿈이자라는뜰 농장, 풀무학교 전공부 텃밭, 풀무학교 고등부 온실등에서 활동을 한다. 가끔은 지역 딸기농장에 초대를 받아 딸기를 실컷 따먹고 오는 날도 있고, 누에치는 집에 견학을 가기도 한다. 꾸준히 학교 밖으로 나와 마을 여기저기와 관계를 맺고 공부를 하는 것이다. 

장애와 농업
농사일을 하면서 배울 수 있는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 농사일은 눈, 귀, 코, 입, 살갗-오감으로 느끼고, 머리를 써야 하는 일이다. 손, 발을 써서 때로는 힘 있게, 때로는 정교하게 온 몸을 움직여 도구와 생명을 다루는 일이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수시로 생각해야 한다. 스스로 일을 찾아 하거나, 지시를 따라야 하는 일이다. 혼자서 일을 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여럿이 어울려 함께 일을 한다. 장애인은 이중 한 두 가지 이상의 영역에서 작지않은 어려움을 겪는다. 그렇다고 장애인은 농사를 지을 수 없다고 단정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농업을 '몸에 익히는 교육', '자립을 위한 직업', '조화롭게 하는 치유'의 과정으로 <장애와 농업>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것이 바람직하겠다.
장애인이건 비장애인이건 홁을 만지며 땀을 흘리고, 어울려 일하는 것을 몸에 익히는 것, 일을 하며 살아가는 힘을 키워가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다만 장애 때문에 그 과정이 어렵고 더디기는 하겠지만 절대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장애인이 농사를 지으면서 몸과 마음과 관계가 건강하게 성장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이것을 돕는 일은 매우 유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정량적인 평가가 어렵지만, 지난 4년 동안 꾸준히 아이들을 지켜본 주민교사들과 특수교사들, 부모들은 이점에 대해 미약하나마 분명한 심증을 가지고 있다. (전문가의 질적, 양적연구가 필요한 지점이기도 하다.)
꿈이자라는뜰을 시작하고 5년을 채워간다. 비록 일주일에 한번씩 두 시간을 만나는 만남이었지만, 5년이라는 짧지않은 시간동안 주민교사와 아이들은 서로에 대한 이해와 애정의 깊이를 더해왔다. 서로에게 익숙하고 편안해지면서, 새로운 마음의 문들이 조금씩 열리는 것이 보인다. 처음엔 농사일을 같이 해보는 정도의 관계였지만, 이제는 김을 매면서 실컷 수다를 떨고, 그 사이에 간간히 비치는 속사정을 살피고, 외롭고 아픈 부분들을 다독여주는 사이가 된 것 같다. 그렇게 시간을 차곡차곡 함께 쌓아갈수록 우리가 서로에게 '살아가는 힘'을 길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직도 가야할 길이 너무도 멀다는 생각이 들어 힘들 때도 있다. 
건강하지 못한 자신의 상태와 안녕치 못한 주변의 상황을 견뎌내는 힘, 이 힘을 평소에 길러두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 힘을 가진 사람은, 비록 장애가 있다할지라도 오히려 건강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렇다면 이 힘은 어떤 것들일까? 이제까지 꿈이자라는뜰의 경험에서 발견한 힘은 바로 앞에서 이야기 한 '풍요로운 추억'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이다. 지난 4년은 지금 또는 언젠가 겪게 될 지루하고 때로는 어려운 일상을 버텨나가는데 필요한 추억과 친구들을 마련하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앞으로의 시간들도 그 연장선에 있다. 
꿈이자라는뜰의 농교육은 농업기술을 아는 것도 중요하게 여기지만, 농사일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이도록 익히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농작물을 많이 수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추억이나 친구와 같은 보이지 않는 열매를 거두어들이는 것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몸과 마음과 관계가 고루 성장하도록 다양한 농적 자극들을 끊임없이 제공하는 것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농업은 몸을 위한 양식은 물론 마음을 위한 양식도 함께 얻을 수 있는 훌륭한 통로라고 생각한다. 농업은 건강한 친구들을 길러내는 농사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장애와 비장애를 넘어서
꿈이자라는뜰 농장의 텃밭은 대부분 틀두둑으로 만들어져 있다. 나무로 만든 네모난 틀두둑은 여러 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일단 두둑이 무너질 염려가 없어서 항상 밭모양이 유지된다. 자연스럽게 구분되는 통로를 이용하다보니 밭을 망가뜨릴 염려가 적다. 일반두둑보다 높이가 있어서 물 빠짐이 좋고, 작업을 하기도 좋다. 나무틀에 손을 짚거나 몸을 기댈 수도 있다. 나무틀에 턱이 있어서 흙을 덮어 놓은 나뭇잎이 쉽게 쓸려가지 않아 좋고, 그 덕분에 풀이 덜나게 할 수 있다. 단점이 있다면 어느 정도 비용이 필요하고, 미리 누군가가 틀을 만들어 앉히는 수고를 해두어야 한다는 것 뿐이다. 
틀두둑을 설치하고 세 해 동안 사용하면서 느낀 점은 이 방식이 농사일을 하는데 매우 유익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장애인의 부족한 생산성을 지속적으로 메꿔 줄 수 있는 훌륭한 보완책이 되어주었다는 것이다. 틀두둑은 장애인이 농사짓기에 매우 유용한 방식이다. 하지만 틀두둑은 장애인만을 위해서 만들어진 방식은 아니었다. 아이들에게도, 노인들에게도 매우 유용한 농업방식인 것이다.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이라는 개념이 있다. 장애의 유무나 연령 등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이 제품, 건축, 환경, 서비스 등을 보다 편하고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설계하는 디자인으로, 보편적 디자인, 모두를 위한 디자인(Design for All)이라고도 한다.
농사일을 배우는 것, 함께 하는 것은 장애인에게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비단 장애인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농사를 짓는 일은 발달장애인, 지체장애인, 정신장애인 뿐만아니라 학령기의 아이들과 노인들 그리고 건강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매우 유용한 틀을  제공한다. 농사는 그 자체가 유니버설 디자인이기도 하고, 조금 더 유니버설 디자인의 의미를 살리는 노력을 꾀한다면 건강치 못한 개인들에게나, 안녕치 못한 사회 모두에게 큰 치유를 가져다 줄 것이라 믿는다.

장애와 마을
지금까지는 농사를 지으며 건강하게 자라나는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이제부터는 마을이라는 작은 사회안에서 건강한 생활환경을 만들어가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려고 한다. 이 부분도 원래는 농사와 연결하여 풀어보려고 했지만, 장애와 연결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보다 직접적인 개연성이 높기 때문에 이것도 꿈이자라는뜰의 사례를 가지고 이야기하려고 한다. 하지만 꿈이자라는뜰의 모든 현재 활동과 앞으로의 활동은 당연히 농촌공동체가 가장 적절한 바탕임을 밝혀둔다.
나는 우리마을 발달장애청소년들이 꿈이자라는뜰 안에서만 배우고, 꿈이자라는뜰 농장에서만 일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 여러 곳곳에서 배우고, 일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더 많이 그럴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 아이들이 마을이라는 든든한 울타리 안에서 배우고, 익히고, 관계 맺고, 자기 자리를 찾아서, 제 몫의 일을 하며 이웃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학교를 졸업한 장애인이 마을일터에 취직해서, 가족과 함께 아침을 먹고, 일터에 걸어 나가 일을 하고, 친구를 만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자연스러운 일상을 누릴 수 있으면 좋겠다. 그 자연스럽고 풍요로운 일상을 만들어내는 일에 국가 또는 사회의 역할이 중요하겠지만, 이것은 다른 누구보다 가까이 사는 마을 이웃들에게 가장 먼저 열려있는 몫이다. 우리 마을 아이들을 위해 건강한 삶의 터전을 마련하는 일은 마을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함께 짊어져야 할 책임이면서, 동시에 함께 누려야 할 열매이다.  
장애인에게 안녕치 못한 생활환경을 조금씩 바꿔나가는 일은, 비단 장애인에게만이 아니라 마을공동체 구성원 모두에게 유익한 일임에 틀림없다. 장애를 배려하는 생활환경은 대부분의 경우에 노인과 유아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이로운 환경이다. 쉬운 예로 보행로에 턱을 없애고 경사로를 만들어 놓으면,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뿐만 아니라 유모차를 밀고 다니는 우리동네 아기 엄마들과 할머니들이 더 반기실 게 분명하다. 발달장애청소년들을 위해 구체적으로 다듬어져 쌓인 꿈이자라는뜰의 농생태교육활동은 비장애청소년들을 위한 농생태교육이 확산되는 일에 긍정적인 자극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장애 청소년을 마을이 품는 일의 연장선은 비장애 청소년을 마을이 품고 정착시키는 일로 자연스럽게 연결 될 것이다. 
살기 좋은 마을, 건강한 사회구조를 만드는 일에 장애는 독특한 역할을 한다. 시작점이 되기도 하고, 촉매제가 되기도 한다. 그냥 지나치고 넘어가기 쉬운 부분들을 세심하게 다시 살펴보게 만든다. 이것은 눈에 보이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 뿐만아니라, 내면의 문제들, 관계의 문제들을 풀어가는 일에도 도움을 준다. 장애를 가진이와 마주하다보면, 쉽게 인식하지 못했던 자신만의 장애를 마주하는 기회를 만날 수 있다. 그렇게 타인의 장애를 마주하고, 이해하고, 돌보는 사이에 본인의 장애를 발견하고 다독일 수 있는 힘이 자연스럽게 길러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장애인에게 도움을 주고자 했던 이들이 오히려 장애인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고백을 종종 듣는다. 

이야기를 마치며.
건강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속을 들여다보면 아프지 않은 사람이 없고, 아프지 않은 사회가 없다. 아울러 누구든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저마다의 크고 작은 장애를 안고 살아간다. 단순하게 눈에 보이는 병이나 장애의 유무를 가지고 건강을 따지는 것은 실은 무의미한 일이다.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란다. 그것은 아프기 않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아파도 견디고 살아 낼 수 있는 힘을 키우며 자라기를 바라는 것이다. 지금 이 마을에서 친구들과 함께 말이다. 십수년이 지나고 난 후에, 우리가 이 마을에서 서로 친구가 되어, 이웃이 되어 함께 살아갈 수 있다면, 참말로 건강하고 좋겠다.





마을 아이들과 함께 농사짓기_ 최문철, 꿈이자라는뜰 일꾼, 충남 홍성


안녕하세요, 보루입니다. 본명은 최문철이구요, 마을에서는 보통 털보, 보루라는 별명으로 불리웁니다. 수염이 많은 가족내력때문인데요, 자주 만나는 아이들은 저를 털보아저씨, 보루샘이라고도 부른답니다. 논밭 다해서 1500평 남짓되는 소농이고요, 경력도 짧아서 평생을 농사짓고 살아오신 어르신들을 만나면 부끄러워 명함도 못내밀 때가 많답니다. 지금 편지를 쓰면서도 그런데요, 부족함을 무릅쓰고 제가 농사짓고 사는 이야기를 조금 해보려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논밭에서 아이들과 만나 함께 농사짓는 이야기를 전해드릴게요.
 

어린이집 아이들과의 만남은, 지난 3월에 <벼돌이의 논농사> 종이인형극으로 시작했어요. 5~7세 아이들에게 한 해 논농사 이야기를 해주는 시간인데, 주인공 벼돌이의 조연으로 출연했었지요. 5월에는 써레질을 같이 하고 논뚝을 바를 예정이에요. 말이 써레질이지, 물댄 논에 들어가 한바탕 신나게 뛰어노는 일입니다. 6월에는 손모내기를 같이 하고, 10월에는 벼바심을 같이 할 예정이에요. 초중학교 아이들과는 6월에 손모내기를 하면서 만나요. 특히 중학교 아이들은 저희 논 모내기를 도맡아 하는데요, 네마지기 논에 100여명이 한 줄로 들어서서 모내기를 하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고등학교 아이들과는 늦가을에 진로이야기 시간에 만나요. 창업(졸업)을 앞둔 풀무학교 3학년 친구들과 만나 이제껏 살아온 이야기와 농촌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눕니다. 매년 이 지역을 찾아오는 대안학교 친구들하고도 비슷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갖곤 합니다. 


농사를 함께 짓는 아이들 중에, 4년째 매주 계속 만나고 있는 친구들도 있어요. 바로 제가 일하는 꿈이자라는뜰 농장에서 만나는 아이들인데요, 발달장애를 가지고 있는 지역 초중고등학교 도움반 친구들이랍니다. 농사일은 눈, 귀, 코, 입, 살갗-오감으로 느끼고, 머리를 써야 하는 일이지요. 손, 발을 써서 때로는 힘 있게, 때로는 정교하게 온 몸을 움직여 도구와 생명을 다루는 일이기도 하구요. 그래서 장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농사를 짓는게 어려울꺼라 생각할 수 있지만, 거꾸로 농사를 지으면서 장애를 이겨내고 건강하게 성장하는 일도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아이들과 함께 농사를 지으면서 바라는 것이 몇가지 생겼어요. 해마다 함께 농사를 지어온 시간들이, 힘들고 어려움을 겪을 때 생각나는 즐거운 추억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농사짓는 부모와 이웃을, 나고 자란 터전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의 씨앗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농부도 좋고, 목수도 좋고, 면서기도 좋고, 선생님도 좋고, 만화방도 좋고, 빵을 만들어도 좋고, 맥주를 팔아도 좋으니 저마다 이 곳에서 좋아하는 일, 할 수 있는 일, 자신만의 몫을 찾아 이웃이 되어 함께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_농촌경제연구원 소식지 <농경나눔터> 2014년 4월호, '농촌에서 온 편지'꼭지에 실린 글입니다.





2010년 농림어업총조사(전수조사)를 바탕으로 산출한 2012년 농림어업조사(표본조사)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농어업인 총인구는 3백만명(3,065,000명)이고, 충남도의 농어업인구는 39만명(390,214명)이다.

(2012년 말, 3농혁신대학에서 본 농림수산식품부 공무원의 발표에 따르면) 정부는 농어업인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정책으로 '10~'14년 동안 7대부문 133개 과제에 34.5조를 쓰기로 했단다. 

이 예산을 대한민국 농어업인 총인구수로 나누어 보았다. 1인당 1,125만원인 셈인데, 5년동안 매달 약 18만원을 받을 수 있는 돈이다. 

(2011년 기사에 따르면) 내가 살고 있는 충남도의 안희정 도지사는 3농혁신 그러니까 농어업·농어촌·농어민의 혁신을 위해 11개 분야에 347개 정책을 제시하고 향후 4년간 4조3090억원의 예산을 쓰기로 했단다 

이 예산을 충남도 농어업인 인구수로 나누어보았다. 1인당 1,101만원인 셈인데, 4년동안 매달 약 23만원을 받을 수 있는 돈이었다.

18만원이든, 23만원이든 아님 20만원이든 매달 기본소득으로 이만큼의 가계수입이 발생한다면 세상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가구로 따지자면 매달 40만원이 가계에 들어오는 것인데, 농어촌에서 매달 40만원은 정말 큰 돈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그동안 어영부영 새나갔던 눈먼 돈들이 절약되고, 행정비용이 절약되고, 이자수익이 발생한다면 액수는 좀 더 늘어날 수도 있겠다. 물론 이 기본소득을 노리고 농어촌 인구가 늘어난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또 있을까? 오히려 도시에서 복지비용을 발생시키던(?) 가난한 사람들이 농촌으로 들어가 살겠다는것인데...

2001년 농업인구 400만명. 2011년 농업인구 300만명. 10년만에 농업인구가 100만명이 줄었단다. 대농위주의 지원정책이 아니라, 농민위주의 기본소득을 펼친다면 소농도 살리고, 농업인구도 늘리고, 자연스럽게 농촌 마을 경제도 활성화 될게 분명해 보이는데... 해볼만한 시도가 아닐런가?

공짜돈의 위력이라는 기사를 읽다가, 삘받아서 녹색평론 131호의 기본소득 기사를 찾아 읽었다. 강샘이 감동을 받았다는 그 이야기를 읽고 나도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이 늦은 시간에 통계자료를 찾아보고 계산기를 뚜드려 본 것이다.

#경자유전 #기본소득 #협동조합

3농혁신을 이렇게 간단명료하게 이야기 해주는 대통령을, 도지사를 평생에 만나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꿈이 너무 큰가? 그럼 줄이자. 이런 3농혁신을 이야기하는 군수님을 남은 생에 만나볼 수는 있을까? 그럴 수 있다면 정말로 좋겠다. 정말로.


좌담| 모두에게 존엄과 자유를 ― 기본소득, 왜 필요한가
강남훈 · 곽노완 · 김종철 _《녹색평론》제131호 2013년 7-8월호
http://greenreview.co.kr/archive/131dialogue_BasicIncome.htm


+ 행여 내 계산이 틀릴 수도 있다. 혹여 내 계산이 못미더우신 어느 공직자분께서 정확하게 자료를 수집해서, 똑뿌러지게 계산을 해봐주시고 결과를 알려주시면 참말로 좋겠네. ㅎㅎ


지난 11월 30일 토요일. 홍성에서 출발한 희망버스가 밀양에 도착해서 처음 발을 디딘 곳은 바로 아래 영상에 나오는 상동면 도곡마을저수지이다. 영상에 나오는 것처럼 저 길을 따라 할매할배들과 함께 산에 올라가기 시작했다. 우리만 아니라 경찰 지원병력도 함께 산에 올랐다. 우리보다 앞서가려고 뛰어가는 손주뻘되는 경찰들에게 할매들이 말씀하신다. "따로 올라가지 말고 같이 올라가자. 죄없는 느그들이 욕본다." 

우리는 결국 110번 송전탑 공사현장을 보고 내려왔다. 내려오고 나서야 할매할배들이 실은 공사현장까지 제대로 올라가 보신 것이 처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산에 올라가는 시도를 안하셨던게 아니었다. 경찰들이 워낙 산밑에서부터 막아댔기 때문에 정작 현장까지는 제대로 못 올라가보셨던 것이었다. 그러니 할매들도 어쩔 수 없이 입구를 지키고 앉아, 산에서 내려오는 경찰차라도 막아서시는 수밖에.

할매할배들이 그동안 정말 올라가 보고 싶었던, 그러나 올라가 볼 수 없었던 송전탑 공사현장. 밀양희망버스를 타고 내려와 <우리 모두가 밀양이다>를 외치는 사람들과 함께 기어이 경찰 저지선을 뚫고 처음 올라가 본 송전탑 공사현장. 그러나 마음 한켠에선 정말로 보고 싶지 않으셨을, 나무를 베어낸 자리에 콘크리트를 붓기 시작한 110번 76.5KV 송전탑 공사현장이 바로 거기 있었다.

토요일 저녁, 밀양희망버스 문화제. <도곡마을에서> 전하는 12번째 밀양영상소식을 보았다. 할매들의 노래도 들었다. '내고향 밀양땅~ 흙에 살리라~ ... 내 나이가 어때서~ 내 나이가 어때서~ 데모하기 딱 좋은 나인데~' 웃으며 노래하시는 할매들의 모습은 더없이 보기 좋았다. 한편으로 속상하고 슬픈 마음도 들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고맙고 또 죄송했다. 하자아이들의 페스테자 공연도, 꽃다지의 공연도 좋았다.

우리 아들딸이 자라서, 페스테자공연단처럼 신나게 놀 수 있으면 좋겠다, 꽃다지처럼 당당하게 노래할 수 있으면 좋겠다. 보고 있자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밀양할매할배들처럼 이웃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죽을 힘을 다해 고향을 지켜내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참말로 제일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그렇게 지켜내고 싶은 고향을 물려주어야 할 책임이 다름아닌 나에게 있다는 것도 되새겼다. 사람이 온 삶을 걸고 지켜내고 싶은 것이 돈이나 명예 따위가 아니라, '내 이웃과 고향땅'이라면 정말 괜찮은 인생 아니겠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문화제를 마치고 상동면 고답마을 회관으로 돌아와 뒷풀이를 하였다. 마을어르신들이 풍성하게 차려주신 고깃상. 따뜻한 회관에서 맛있게 먹고 배를 채우면서도 한편으론 송구스러웠다. 이렇게까지 대접받을기 아인데... 게다가 핵발전 그만하자고, 송전탑공사 중단하자고 신나게 외쳐놓고는, 마을회관에 들어오자마자 바닥난 아이폰 배터리를 충전하려고 빈 콘센트부터 찾아 다니는 내 모습을 보면서 이래저래 마음이 많이 불편했다.

12월 1일 일요일 아침. 어제 내렸던 도곡마을 저수지에 다시 모여 아침을 나눴다. 장작불이 두 개가 올라가고, 밥을 나누고, 노래를 나누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흔을 넘기신 할매가 이야기하셨다. 조상대대로 맹글어온 논밭을 지키고 싶은데 힘이 없다고. 걸음을 몬걸어 산에도 몬올라간다고. 방에 앉아있다 헬리콥터소리가 들리면 가슴이 쿵쾅쿵쾅한다고. 근데 이렇게 와줘서 밤에 잠이 다 안오도록 고맙다고...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할매할배들의 일상과 진심이 그대로 묻어나는 시위모습은 정말이지 감동적이다. 울어야 할 때 울고, 웃어야 할 때 웃고. 욕해야 할 때 욕하고, 실갱이해야 할 때 실갱이하고. 챙겨줘야 할 때 챙겨주고, 다독여야 할 때 다독여주고... "오늘 하루 잘 싸우고 내일 하루 잘 준비하자. 어르신들은 그렇게 싸우면서 8년이 흘렀습니다." 밀양송전탑반대대책위원회 김준한 신부의 말이다. 오늘 아침에도 그 모습 그대로 울고, 웃고, 이야기하고, 노래하면서 당신들이 8년간 아니 평생을 쌓아오신 내공을 우리들에게 그대로 물려주셨다. 

보라마을에서 정리집회를 마치고 헤어지는 시간. 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 마주치는 밀양어르신들 한 분 한 분에게 고개숙여 인사를 드렸다.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손을 맞잡는데 눈물이 새어나왔다. 고맙다고 안아주시는데 눈물이 터져나왔다. 미안한 마음, 고마운 마음, 속상한 마음이 한데 뒤엉켜서 눈물이 그치지가 않았다. 휴....

돌아오는 길. 옥천휴게소를 지나자 고속도로 광고탑 위에서 흩날리는 깃발들이 보인다. 유성기업 노동자들이란다. 그제,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노동자 한 분이 또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일터로, 가족에게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노동자가 이 세상에 어디있을까? 그런데 이 추운 겨울에 왜 사람들이 길을 막고 서있어야만 하나? 탑위에 올라가 있어야만 하나?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야만 하나? '아무 욕심도 없이 지금 이대로만 살 수 있기를' 바라는 그 마음을 세상은 왜 몰라주나?


#우리모두가밀양이다
20131130 #밀양희망버스
#밀양765kV송전탑OUT
#송전말고밭전
#공사말고농사

밀양 땅에, 할매할배들의 삶에 평화가 깃들기를...
Peace be within Miryang!




2013.11.30. 밀양희망버스 문화제에서 상영한 <밀양영상소식12; 도곡마을에서>
http://tvpot.daum.net/v/v690bRD6Fp66DgglpGXuDFe
제가 참석하고 있는 무교회 일요집회에서는 여러 사람이 돌아가면서 주일말씀을 전합니다. 한 두 사람이 말씀을 전하는 것 보다는, 모든 사람이 성서를 읽고, 나름 깨달은 바를 서로 나누는 것이 무교회의 본 방향이라는 뜻에서 몇 해 전부터 그렇게 하고 있지요. 그 덕분에 저 같은 사람도 일년에 두 번 정도 강단에 서서 말씀을 전합니다. 아래 글은 2013년 4월 7일 풀무일요집회 본강에서 나눈 이야기를 다듬은 것입니다. 이 글의 절반을 차지하는 김재수형이 자신의 글을 공개한 것처럼, 저도 공개를 하렵니다. 질문과 반론은 환영합니다. 다만 그때그때 성실한 답변은 약속드릴 수 없습니다. 이해를 바랍니다.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서기관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_마가복음 12장 28절~34절


오늘은 자본주의와 이웃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주제가 너무 거창한 것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만, 실은 그렇지 않은 이야기, 그렇게 여기지 말아야 할 이야기들이니, 최대한 끌어당겨서 가까운 이야기로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미국 어느 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는 김재수님의 글을 함께 읽고 나누려고 합니다. 이 글은 그 분이 얼마전에 미국 동부지역의 기독 청년이 모이는 킹덤이라는 집회에서 강의했던 "하나님의 나라와 자본주의"에 대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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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라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것과 같은 세상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 세상을 하나님이 아닌 무엇이 통치하고 있는지 먼저 질문해야 합니다. 앞서 설명 드린 것처럼, 예수시대에는 로마 제국주의와 성전체제가 통치했고, 이 시대에는 천민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가 통치하고 있습니다. 특히 가장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고통의 장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기업들의 무자비한 이윤추구는 종종 우리 이웃들의 희생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고, 우리 현대인들은 그 과정의 톱니를 이루는 노동자로 소비자로 참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노예제도가 있던 시절, 대부분의 사람들 - 노예주와 노예 모두가 노예제의 부당함을 인식하지 않으며 살아간 것처럼, 우리도 자본주의의 지배를 부당하지 않게 여기며 살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최고선은 기업의 이윤추구입니다. 이윤추구는 모든 것보다 중요한 목표가 되고, 모든 수단을 정당화 합니다. 1993년 크리스마스의 늦은 밤, 한 여인이 네 명의 아이들을 태우고 Malibu를 운전하고 있었습니다. (말리부는 제너럴모터스라는 자동차회사의 한 차종입니다) 빨간불 앞에서 잠시 정지하고 있던 중, 갑자기 뒤에서 차량이 충돌하였고, 곧 그녀와 아이들이 탄 차량은 불길에 사로잡혔습니다. 세 명의 아이는 60% 이상의 화상을 입었고, 그녀는 한 손을 절단해야 했습니다. 이후 지루한 법정 공방을 통해서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GM은 비용 절감을 위하여 연료탱크를 차량축 바깥에 설치하였습니다. 물론 GM은 사고 시에 큰 화재가 날 수 있다는 사실을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경영진은 이와 관련한 비용과 편익을 분석하였습니다. 예상 사망자 500명, 사망자당 평균 보상비용 $200,000(20만달러, 2억2천만원), 예상 판매 대수 41,000,000(4천백만)대. 결국 차량 한 대당, 사고에 따른 기대비용은 약 $2.40(2,700원)이었습니다. 반면 사고 시 연료탱크에 화재가 나지 않도록 차량을 설계하기 위해서는 한 대당 $8.59(9,700원)를 지출해야 했습니다. 결국 GM은 대당 $6.19(7천원)의 편익을 얻기 위해 사람들이 죽도록 방치하는 방식을 선택한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이 사용하고 있는 각종 제품을 만드는 삼성의 반도체 공장에서 58명의 노동자들이 백혈병 및 각종 암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과 나이가 다르지 않은 젊은이들이 죽어 나갔습니다. 안전장치도 없이 각종 화학 유해 물질에 노출된 환경에서 일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부는 이를 조사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언론도 일반 대중들도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삼성 때문에 한국이 먹고 산다고 믿는 이들이 참 많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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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수님의 원 글에는 없는 내용이지만 삼성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하도록 하겠습니다. <삼성이 버린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삼성전자·반도체에서 일하다가, 병들거나 죽은 사람들, 그리고 그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반올림에 제보된 150여명중 11명 노동자의 몸과 삶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책에 있는 이야기 중에 유명화님의 인터뷰 한 구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고3 여학생이었던 유명화님은 2000년 삼성반도체 온양공장에 입사해서 고온테스트공정에서 일하다가 1년 만에 중증 재생 불량성 빈혈에 걸렸습니다. 

"못 해본 게 너무 많죠. 연애도 못해봤으니까. 어딜 놀러가 보지도 못했고. 저는 졸업여행도 못 갔거든요. 삼성에 3학년 때 들어가서.... 다시 시간을 되돌린다면 삼성에 가지 않을거에요"

유명화님은 2001년부터 현재까지 12년간 남의 피를 수혈 받아 생명을 이어왔는데, 최근에 상태가 많이 악화되어서 무균실에 입원해 있다고 합니다. 삼성에서 남편을 잃은 아내, 정애정씨의 이야기를 다룬 <먼지 없는 방>이라는 만화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보도자료에서 일부를 읽어드리겠습니다. 

정애정씨는 열아홉 살에 삼성반도체 공장에 들어갔다. 엄마 품을 떠나 독립을 했다는 것이 좋았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삼성에 입사한 것도 좋았다. 삼성맨이라는 자부심으로 열심히 일을 했고, 그곳에서 남편 황민웅 씨를 만났다. 첫째아이로 아들을 낳고 둘째아이를 가졌을 즈음에 남편이 백혈병에 걸렸다는 걸 알았다. 남편은 둘째아이의 출생신고를 손수 마치고 골수이식 수술을 기다리다 끝내 세상을 떠났다.
 
정애정 씨는 삼성반도체 공장에 들어가 처음으로 반도체를 만났다. 기름때와 어두운 색깔의 작업복으로 생각되는 일반적인 공장과는 달리, 반도체 공장에서는 티끌 같은 먼지 하나도 철저하게 관리한다. 하얀색 방진복과 방진모, 마스크를 쓰고 ‘에어샤워’까지 한다. 공장 안은 특수 배기시스템을 통해 먼지가 걸러진 공기가 흐른다. 공장 안에서는 모든 것이 깨끗해야 한다. 먼지가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사람도, 물건도 공장의 청정수칙에 따라 다뤄진다. 반도체는 먼지에 아주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반도체 공장을 부르는 말 ‘클린룸’. 그러나 정말 깨끗할까? 큰 설비와 수많은 기계에서는 기계 소리가 계속 났다. 공장 안에 들어서면 항상 화학약품 냄새가 났다. 직원들 사이에서 누구는 아들을 못 갖는다는 둥 뜬소문이 돌았다. 여성 작업자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생리불순이나, 하혈은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생기는 당연한 일로 생각했다. 심지어 종종 들리는 유산 소식도 단순한 개인의 문제로 돌려졌다. 그 누구도 공장의 환경이 반도체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깨끗한지 묻지 않았다.

저는 지난해 여름, 우연히 홍성도서관에서 이 책 <먼지없는 방>을 꺼내들어 읽었습니다. 터지는 울음은 간신히 참아냈는데, 가슴이 먹먹한 것은 도저히 어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다시 김재수님의 글로 돌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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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레이건 대통령, 영국의 대처 수상 이후로 우리는 지난 30년 동안 이어진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는 경제 성장을 최우선의 정책 목표로 합니다. 경제 성장이 공정한 분배보다 중요하다는 인식 때문에, 부자감세 즉 최상위 소득층에 대한 세금 감면이 주요 경제 정책입니다. 따라서 경제 성장이 이루어진다 하여도, 그 혜택은 소수의 특권 집단에게 집중되고, 대다수 국민들의 삶의 질은 향상되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신자유주의는 정부의 역할을 줄이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있고, 복지 예산 및 가난한 사람들을 보호하는 사회적 안전망을 축소하였습니다.

그 결과, 지금은 어느 때보다 빈곤층의 증가 및 양극화 현상이 두드러집니다. 미국은 산업 국가 중에 가장 극심한 소득불평등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상위 0.1% 소득층의 수입은 하위 90% 소득층 평균 수입의 220배를 벌고 있습니다. 자산불평등은 더욱 심각해서, 상위 1%의 사람들은 전체 자산의 1/3 이상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미국의 중산층과 저소득층은 대부분의 자산을 손실했지만, 이 와중에서도 최상위층의 소득 및 자산은 증가 하였습니다. 더 큰 문제는 기회조차도 더 이상 평등하게 주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소득 분포상 하위 50% 이하의 학생들이 상위 대학에 입학하는 비율은 9%에 불과합니다. 즉 여러분의 부모님이 부자이고 고학력자라면 좋은 대학에 가고 고소득 직장을 얻을 확률이 높지만,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도 가난하게 살 확률이 높다는 이야기입니다. 경제학자들은 미국이 더 이상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메리칸 드림을 원하시면 덴마크로 가십시오.

한국의 상황 역시 심각합니다. 세계 최빈국 중 하나에서 부자클럽이라는 OECD 회원국이 되었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소위 자살공화국이라 불리울 정도로 최고의 자살률을 보이고 있습니다. 어린이와 청소년의 행복지수는 최하위이고, 비정규직 비율과 저임금 노동자의 비중 그리고 노인빈곤율 역시 가장 높습니다. 역시 사교육비 부담도 최고입니다. 성폭력은 세계 4위, 아동 성범죄는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문가가 아니어도 이 모든 문제들의 근원으로 자본주의의 무한경쟁과 경제적 불평등 현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시대를 사는 청년들에게 부탁드립니다. 역사적 예수의 영성을 따라, 체제 밖의 사람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영성을 배우십시오. 하나님의 영이 임재하는 순간은 다른 사람의 고통이 자신의 고통으로 느껴지는 때입니다. 하나님이 임하시면, 우리같이 이기적인 사람도 자아중심성이 무너지고, 다른 이의 아픔을 공감하게 됩니다. 청년 여러분, 성령충만을 받으십시오. 삼성전자의 반도체 공장에서 죽어간 여공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쌍용자동차의 해고 노동자들의 자살 행렬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의 아픔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때에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임재하고 계십니다. 청년 여러분, 성령충만을 받으십시오.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죽어간 팔레스타인 아이들, 이미 몇만명이라는 민간인 사망자를 낳은 시리아 사태, 구럼비 바위와 함께 평화의 정신이 산산이 부서지고 있는 제주도 강정마을의 현실, 북송의 공포로 떨고 있는 탈북자들의 아픔이 여러분 자신의 아픔이 되는 성령충만함을 받으십시오.

삶의 벼랑 끝에 내몰린, 고통 속에 신음하는 이들의 아픔에 주목하십시오. 그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가지고 오십시오. 도리어 여러분이 겪고 있는 상처가 치유되는 놀라운 경험을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삶의 무게도 가벼워지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신비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신앙 고백이고, 이 땅에서 얻는 구원과 해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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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김재수님의 이야기이구요, 지난 1월 페이스북을 통해 이 글을 접하면서 언젠가 풀무고 친구들에게 전해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김재수님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하기란 거의 불가능다는 인식이 필요합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왜 그럴까요? 자본주의의 핵심은 돈입니다. 돈이 가지고 있는 화폐가치가 워낙 높다보니 어느새 하나님도 가려지고, 사람도 가려지기 때문입니다.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것이지요. 둘째로 돈이 가지고 있는 교환기능은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 시켜주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완전한 단절을 만들어냅니다. 내가 원하는 어떤 것을 손에 넣기 위해 내 손에 피한방울 안 묻혀도,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내가 지불한 만큼 원하는 어떤 것이 척척 손에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셋째로는 이런 상황이 너무나도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중의 대부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자본주의 말고 전혀 다른 사회를 통째로 접해볼 기회가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그 많은 노예와 종들이, 그 오랜 세월동안 스스로의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인 것처럼요. 물론 노예들이 억울함을 느끼고 한을 품기도 했지만, 그 상태를 역전시키고 싶다, 역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지요. 넷째로는 이런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또는 의도적으로 자본주의를 확대, 재생산, 강화시키는 미디어에도 큰 책임이 있을 것입니다. 이쯤에서 권정생 선생님의 글 중에 한 구절을 인용해서 함께 읽겠습니다. 

   오늘날 이 지구 위엔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만, 그러나 아직도 끔직한 살인과 약탈은 끊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도의 지능으로 속임수를 써가며 죽이며 빼앗습니다. 그 방법이 너무나 교묘하기 때문에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 분간이 잘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잘못 판단하면 어느새 나 자신이 끔찍한 흉악범의 편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입고 있는 옷과 오늘 아침에 먹은 음식과 그리고 무엇을 지니고 있는가 모두가 정당한 것인지 생각해보셨나요? 
   무엇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를 부당하다고 생각하신 부처님이나 예수님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것으로 우리를 가르쳐주었습니다. (중략) 우리가 알맞게 살아갈 하루치 생활비 외에 넘치게 쓰는 것은 모두 부당한 것입니다. 내 몫의 이상을 쓰는 것은 벌써 남의 것을 빼앗는 행위니까요. 
_<우리들의 하나님> p.10 책머리에 

권정생 선생님의 글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언제나 강력한 메세지를 전해주십니다. 다른 말 덧붙일 것도 없이 새겨 읽고, 또 새겨들어야겠습니다. 

앞서 나누었던 김재수님의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자본주의를 바로 알자. 그래야 부당한 지배와 인식에서 벗어나 진짜 내 이웃이 누구인지 눈에 들어오고 또 그 이웃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처럼, 시대의 약자들에게 귀를 기울이자, 이웃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받아들이자는 것입니다. 그 순간에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또 성령께서 임재하셔야 온전히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저도 여러분에게 동일한 내용을 부탁합니다. 사람은, 학생인 여러분은, 또 나이를 막론하고 학생과 신앙인의 의무를 지닌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은 '내가 원하는 것이 진짜로 내가 원하는 것일까?'를 끊임없이 되묻기를 바랍니다. 내 의도와 상관없이 ‘물려받은 또는 전염된 욕심은 아닐까?’를 늘 살펴보기를 바랍니다. ‘나’라는 존재는 언제나 세상과 연결되어있습니다. 때문에 나를 살피는 것처럼, 세상을 살피는 것에도 열심을 내야합니다. 나의 신앙을 바로세워서 하나님을 바로 섬기고, 이웃을 온전히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끊임없이 살피고 살펴야 합니다. 

이번에는 저의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6년전, 그러니까 이 곳으로 내려오기 1년 전에 서울에서 들었던 생태학교 수업을 마치고 쓴 후기입니다. 이 수업은 기독청년아카데미와 기독교환경운동연대가 공동기획해서 마련한 수업이었구요, '인간과 자연이 더불어 사는 삶'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8주 동안 공부하는 과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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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봄학기 기독청년아카데미 생태학교 수업 후기
나는 오늘도 두 사람을 죽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대한민국의 어떤 현행법도 나의 살인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았다. 아니 관심도 가지지 않았다. 나의 생태발자국*은 330이다. 이 수치는 오늘 하루 나의 삶을 위해 세 사람 분의 지구를 소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먹고 마신 공기와 음식은 동시대일 수도 있고, 다음 세대일 수도 있는 어느 두 사람의 생존을 위해 절대적인 것이었을게다. 결국 나는 오늘 하루 나의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두 사람의 목숨을 빼앗은 셈이다.

과대망상증 환자의 헛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차근차근 생태학교 수업을 듣다보면, 이 이야기가 터무니없이 비약적인 논리로 짜여진 허무맹랑한 소리가 아님을 잘 알 수 있다. 다만 처음에는 '실감'이 안날 수도 있다. 내가 생태학교 수업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빼앗은 생명과 깨트린 평화에 대한 '실감'이었다.

'잘' 살고 싶었다. 나와 아내, 그리고 이번 여름에 새롭게 태어나는 아이의 건강한 삶을 위해 좋은 것을 먹고, 입고, 마시고 싶었고, 궁극적으로는 도시를 떠나 자연과 가까운 곳에서, 흙을 밟고, 맑은 공기를 마시며, 내 손으로 직접 지은 집에서 살고 싶었다. 그렇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생태적인 삶이, 친환경적인 삶이 다른 어떤 삶보다 사람에게 이로운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처음에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좀 더 '잘' 살 수 있을까를 배우기 위해 생태학교를 시작했다.

'살리며' 살자. 나와 내 가족만 잘 사는 것을 넘어, 사람과 자연을; 이웃을 살리며 살자. 아니 일단은 '덜 죽이며' 살자. 생명을 살리기는커녕, 죽음으로 몰아넣으며 이제까지 하루하루 살아왔음을 실감하는 것은, 인정하는 것은 ‘생명을 살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자고 다짐한 나에게 무척이나 모른 척하고 싶은 일이었다. 하지만 외면한다고 회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사람과 사람이, 사람과 자연이 어떻게 연결되어있는지 실감할수록,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새롭게 배우고 깨달을수록, 그래서 마음이 무거워지고 괴로워질수록, 몸이 지금보다 불편해질수록 오히려 그게 그리스도인답게, 사람답게, 바르게 사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 생태발자국은 한 사람이 삶을 영위하기 위해 매일매일 '소비하는 자원'을 생산하고, '배출하는 쓰레기'를 처리하기 위해 필요한 토지와 물의 양을 계산한 것이다. 계산된 결과 수치는 자연에 얼마만큼 해로움을 끼치고 있는가를 보여주며, 한 사람의 생활을 위해 몇 개의 지구를 소모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생태학교 수업후기> 2007.5.29 http://www.waterclimber.net/blog/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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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후기의 내용 중에 따로 '자본주의'라는 단어를 언급하지는 않았습니다만, 당연한 배경이었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나름 생태적으로 살아보려고, 소비를 줄여보려고 애쓰던 신혼살림이었지만,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직장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자본주의 체제의 충실한 일원으로 살아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나 자신도 알게 모르게 누군가를 착취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상태에 놓여있었다는 것이지요. (도시와 농촌을 비교해서 농촌이 더 좋다는 이분법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여기 작은 농촌마을에서 살아간다고해서 자본주의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니까요. 오히려 정신을 차리고, 지금 여기에서 나를, 이 사회를 잘 살펴보자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번에는 목적이 이끄는 삶에 나오는 한 구절을 인용해보겠습니다. 

Everybody eventually surrenders to something or someone. ... You are free to choose what you surrender to, but you are not free from the consequences of that choice. ... Surrendering is never just a one-time event. ... Surrendering is moment-by-moment and lifelong. 
_The Purpose Driven Life Day 10

우리 모두는 결국 무언가 또는 누군가에게 항복을 합니다. 자신을 내어 맡깁니다. .... 당신은 당신이 어디에 항복할 것인지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 선택의 결과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 이런 항복은 일회성 이벤트가 결코 아닙니다. .... 항복은 매 순간 평생동안 이어지는 일입니다.

다시 한번 권합니다. ‘매일의 삶 가운데 나의 주인은 누구인가? 나는 의식적으로 누구를 섬기고 있으며 무의식적으로 무엇에 지배당하고 있는가?’를 잘 살펴보시기를 권합니다. 여러분 삶의 주체는 진정 여러분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렇게 자신의 삶의 참주인으로서 책임있는 믿음과 의지와 행동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권정생선생님의 글 중에 두 구절을 인용하면서 오늘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공존은 성스럽다. 이웃 사랑은 남의 것을 빼앗지만 않으면 된다. 되고 주고 말로 빼앗아 가는 자선사업은 가장 미워해야할 폭력행위이다.
_<나의 동화 이야기>중에서, 권정생, <<빌뱅이 언덕>> p.18

   가난한 자에게 필요한 것은 그 가난한 자 곁에서 함께 가난해지는 것뿐이다. 예수님이 만약 화려한 옷을 입고 고급주택에 살며 고급승용차에 경호원을 데리고 나타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몇백만원씩 나눠주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가 능수능란한 부흥사도 아니고 자선가도 아니고 혁명가도 아니고 예언자도 아니라 가장 소박한 한 인간으로 우리 곁에서 33년 동안 고락을 함께 해준 삶 때문인 것이다. 이 세상에 위대한 성자는 예수님 한분으로 족하다. 
   우리는 누구나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 생각해보면 허무하기 짝이 없는 짧은 목숨인데 만물의 영장이라 일컫는 인간들만 유독히 이 지구상에 암처럼 온갖 나쁜 짓을 다 저지르고 있지 않은가. 지구 멸망은 인간들의 욕심이 빚어낸 결과이지 결코 천재지변은 아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어떤 직분을 가졌든 함께 일하며 살아가는 삶이 있을 때, 이 험함 세상 조금은 따뜻해지고 시한부 종말을 기다리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없어질 것이다. 가장 겸손한 삶은 이웃과 함께 일하며 살아가는 것뿐이다. 
_<휴거를 기다렸던 사람들>중에, 권정생, <<우리들의 하느님>> p.41




  1. 현욱 2013.04.26 10:24 신고

    주님께서 일러주신 이웃을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신말씀 . 거기엔 현재의 이웃의 고난을 도우라는 말씀도 되겠지만 그보다 주님께서 일러주신 가장 선한 일은 썩지않을 면류관을 위한 복음을 그들에게 전하는게 아닐까
    현재의 고난과 핍박보다 낙원에서 주님과 함께 할 소망이 비록 원수같은 이웃에게도 주어 진다면 그보다 더한 사랑의 완성이 어디있을까..

  2. 현욱 2014.06.21 02:04 신고

    아아 내가 일년전에 저런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구나 .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실제의 삶 가운데에서, 복음은 주님 스스로 말씀으로 당신의 백성들에게 들어와 버린다는 진리를 바라봅니다.

마을개발사업 보조금과 그 때문에 망해가는 마을에 대한 명일형의 이야기를 읽고 다시한번 뜨끔했다. 희망마을만들기 사업에 마을 추진위원으로 참여하면서 시간이 갈수록 드는 생각은 아예 시작을 말았을 것을 하는 것이다. 교수와 공무원, 컨설턴트들과 미팅하고 마을만들기 교육연수에 참가하는 시간에, 오히려 훈호씨를 데려다가 마을회관에서 훈훈한 건강상담소를 여는게 훨씬 마을에 이롭다는 생각도 든다. 

사람이 먼저고, 마음이 먼저가 아닌 이상, 사업보조금을 끌어와서 하는 일들은 차라리 안하니만 못하다는게 점점 불을 보듯 뻔해진다. 물론 내가 시작한 일도 아니고, 돈을 타내려고 시작한 일도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돈을 써야하고 성과를 내야하는 사람들과 발을 맞춰야 하는 상황에선 나의 속도를, 마을의 속도를 지켜내기가 너무 어렵다. '결국 같이 변하지 않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준호형 같은 공무원이 가까이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희망마을사업이야 내가 어찌 할 수 있는게 아니다만,
내 갈길은 내가 틀어서 바로잡아 갈란다.

준호형의 이야기 http://www.facebook.com/junho.kim.5851/posts/514658025243981 
1월 1일
"지금 인류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진실로 ‘좋은삶’ 혹은 ‘좋은사회’를 상상할수있는 능력이다. ‘좋은사회’란 무엇보다 안심하고 자식을 키울수있는, 자연과 인간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지속가능한 사회여야 한다"_김종철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67716.html

개같은 내 인생~ 이 참 행복하다. 고맙다. RT “@mamarchive: 야호, 새해첫날. 아빠는 개처럼 달린다. pic.twitter.com/TENI2umV”



#Twitter & #Facebook 단상: 수시로 기록을 남겨 공유하고, 다양한 현상들을 살펴보기엔 참으로 좋은 도구이지만, 현상들에 주목하다가 오히려 본질은 놓치고 마는 경우가 종종 생기는 것 같다. 어쩌면 좋을까?


1월 5일
깊어가는 겨울밤 #협동조합 마을카페 뜰을 가득 채울 음악은 <미드나잇 인 파리> OST앨범입니다. 시간여행겸 음악여행겸 뜰에 잠깐 들르시지요~ 아, 오늘부터 꿈이자라는뜰 유기농 허브차도 뜰메뉴에 들어간답니닷! _오늘의 뜰당번 문철올림

<태양이 만든 난로 햇빛온풍기>를 읽고 있는데 쉽고 재밌다. 올해안에 햇빛온풍기랑 온수기, 건조기 다 만들어봐야지. 그나저나 올려드릴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만들어서 철탑위에 계신분들에게 전해드리고싶닷. 힘내세요!
pic.twitter.com/C45bQ0vD



1월 8일
꿈이자라는뜰(@Greencarefarm) 방학중 수업을 마치고 배웅하는 길에, 한아이가 이야기한다. 집에 가면 할 일 없어요. 심심해요. 선생님네 놀러가도 돼요? 라고 묻는데, 선뜻 오너라고 이야기를 못했다. 마음이 찜찜하다.

꿈뜰의 또 다른 아이가 주일마다 교회에 가고파하는 이유는, 가지 않으면 따로 할일이 없고 심심하기 때문이란다. 비단 그 아이만의 일상이 아니다. 가정에서의 돌봄이 부족한 처지의 마을 아이들을 끌어 안으려면 어찌해야하나...

방과후에, 주말에, 방학때 뭉쳐서 놀 친구가 필요하고, 있는듯 없는듯하지만 따뜻한 시선으로 지켜봐줄 어른이 필요하다. 이들이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아늑하고, 안전하고, 열려있는 공간이 마을에 필요하다. 꿈뜰농장이 그런 아지트가 되었으면 좋겠다.


1월 10일
Backing up my tweets with @backupify - free Gmail, Facebook, and Twitter backup http://backu.me/free


1월 11일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에요. 아이들은 살아가면서 작은 선택에서부터 커다란 선택까지 하게되지요. 그 선택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게됩니다. 저는 아이들이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는 공간, 그 선택을 존중받을 수 있는 공간이 이런 서점이라고 생각해요. (계속)

(이어서) 여기서는 어떤 책을 선택해도 좋은 책이니까 아이들이 골라오는 책을 마음 놓고 칭찬해 줄 수 있고, 그 선택을 존중해 줄 수 있어요. _최영미, 어린이청소년 전문서점 알모, 개똥이네집 인터뷰 <아이들에게 선택권을 주어야 합니다>중에.


1월 15일
엄니가 농사일을 확 줄이시겠단다. 그동안 일 좀 적당히 하자고 아무리 떼를 쓰고 또 써도 놓지 않으셨던 일들을, 이제는 당신 몸이 힘들어서 아니 아들래미 병수발들게 만들면 안되겠어서 그만두신단다. 속상하고 속상하다.


1월 16일
훈훈한 건강상담소 겨울강연회 2탄:인생 이모작, 시작해볼까? - 건강공동체 ‘의료생협’이야기_1월 16일(수) 오늘 낮 2시부터 / 홍동 밝맑 도서관 1층 / 박봉희(한국의료생협연합회 부설 교육연구센터 소장)
http://hoonoon.tistory.com/m/post/view/id/5

마주한 물살이 세차다면, 앞을 향해 나가려고 기를 쓰고 애를 써야 겨우 그 자리를 지켜 버텨낼 수 있는 법인데... 나는 그저 버티는 것만도 다행이라며 현실에 안주했었다. 이제와보니 생각보다 물살이 세차다. 기를 쓰고 앞으로 향해야겠다. #꿈이자라는뜰

1월 18일
눈물나게 미안하고 또 고맙고.. "...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믿는다. 그러니 너희도 너희들을 믿어라. 결국엔 우리가 이긴다. 야들아, 힘내자. 우리 할매들은 끄떡없다."_밀양송전탑 반대투쟁 할매들이 노동자들에게
http://youtu.be/9rG5H79MNfk


1월 21일 꿈이자라는뜰 ‏@Greencarefarm
오늘부터 꿈이자라는뜰 #마을일터 인턴쉽과정 시작합니다~ 어린이집과 쌈채소농장 두 곳에 출근시키고 인사다녀오는 길이에요. 두 곳 모두 따뜻하게 맞아주셔서 정말 고마웠습니다. 우리 아이들도, 일터도 일주일간 더없이 소중한 경험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꿈뜰아이들의 어린시절과 속사정을 잘 알고 계신 어린이집 울타리선생님의 이야기_여기 어린이집에서 자란 우리 아이들이 다시 여기에 취직해서 함께 일하면 좋겠다고, 책임을 느끼신다고, 같이 돕겠다고 얘기해주셨어요. 얼마나 고마운지요. (좋아서) ㅠㅠ


1월 21일
인사 #청문회. 매년매번 볼때마다 화가나는 것은; 나쁜 짓도 많이하고, 실력도 성품도 못난 사람을 굳이 뽑으려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여태까지 그 자리서 계속 일하도록 내버려두었나하는 점이다. 공직사회에서 그정도 흠결은 암것도 아닌겐가? #이동흡


1월 22일
전남 보성 우리원에서 정농회 겨울연수모임중. 어쩌다보니 복잡한 머리와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오게되었다. 위로를 얻고, 생기를 되찾아 집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반가운 얼굴들이 보인다. 희망이 보인다. #피난
pic.twitter.com/XpjjdIMN

#협동조합 만들때 "마음을 공유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고 다음은 가치에 기반을 둔 수익모델을 만들어야 하는데 처음부터 마음의 공유가 안 된 사람들을 모아놓고 논의를 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갈등이 생길 수 있다"_유호근
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1827253


1월 23일
봄의 과수원으로 오세요. 꽃과 촛불과 술이 있어요. 당신이 안오신다면 이런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겠어요. 당신이 오신다면 또한 이 모든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겠어요. _정민아저씨가 정농회 포럼중에 소개해주신 잘랄루딘 루미의 시


1월 26일
이담에 또 가자~ 700km! @mamarchive: 벌교, 남해, 섬진강, 하동, 구례, 지리산 자락..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곳을 지나왔다. 남도는 참말로 멋져브러요. 참말로 이쁘오. 음식도 찐하재, 맛나죠잉?
pic.twitter.com/KhRfjDKH



가장 단단한 것은 일상이다. 꾸준히 살아내는 삶처럼 위대한 것은 없다_김류미 진지하되 진부하지 않고, 유쾌하되 유치하지 않은 동네아저씨. 말보다 삶으로 존경받는 동네할배가 되고프닷.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69448.html


1월 28일 mamarchive ‏@mamarchive
좋은 미래를 추구하기보다 좋은 과거를 축적해 가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기가 죽을 필요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도 괜찮다는 것, 지금 괴로워 견딜 수 없어도, 시시한 인생이라고 생각되어도, [살아야하는 이유/ 강상중]


1월 28일 꿈이자라는뜰 ‏@Greencarefarm
2013년 1월 30일 수요일 오전 10시, 밝맑도서관 1층에서 <깨어나라! 협동조합>을 함께 읽고, 이야기하고, 공부합시다. http://greencarefarm.org/179 


1월 31일
온 몸이 가려워서 어쩔줄 몰라하는 아이의 등짝을 거친 손바닥으로 한참을 쓸어내렸다. 아이가 반쯤 잠든 목소리로 아빠가 쓰다듬어줘서 정말 좋다고, 계속 쓰다듬어달란다. 문득 가려움증은 나를 좀 어루만져달라는 아이들의 청신호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홍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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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쁘게 잘자라 주어 고맙다. 내일 넓은 논으로 이사가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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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모내기하는날, 오늘은 결혼기념일.
농사짓고 살 줄 알았으면 농한기에 결혼식을 올렸을텐뎅...
해마다 아내에게 미안할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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